선화의 이야기
선화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에게 쏘아붙였다.
"오빠 창문에 화분은 왜 꺼내놨어?"
화장실에서 왠 남자의 목소리가 답했다.
"아 미안. 낮에 햇빛 쪼여준다고. 깜박했다. 늦었네."
"응."
잠시 뒤, 화장실에서 나온 건장한 남자는 늘 해왔던 일을 하듯 익숙하게 선화를 끌어안고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선화는 조금 반항을 하는듯하다가 남자가 우악스럽게 치마 속으로 손을 짚어넣자 이내 순응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팬티를 능숙하게 벗겨내더니 선화를 침대에 눕혔다. 선화는 남자가 태식이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처박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선화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남자와 선화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남자의 이름은 태호, 과거 선화가 교제하던 남자다.
선화와 태호가 함께 살기 시작한 건 반 년 정도 되었다. 과거의 연인일 뿐, 지금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방을 밤을 공유하는 사이일 뿐이다. 그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성관계를 할 때면 피임을 확실히 하고 있었으며 방세와 관리비 따위는 정확하게 반씩 부담하고 있었다.
선화는 처녀성을 태호에게 잃었다. 거의 반강제적인 행위였으며 만난 지 채 3주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태호의 행위는 선화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선화는 그와는 무관하게 태호에게 꽤나 빠져있었다. 덕분에 그런 행위 역시 참아냈고, 받아줄 수 있었다.
첫 경험 이후, 만날 때마다 이어지는 태호의 요구를 들어주다 선화도 결국 태호의 방식, 육체적인 관계와 그 즐거움에 눈을 뜨는데 이르렀다. 그러나 원체 육체관계에 집착하다 보니 그 이상의 흥미나 재미를 찾기 어려웠다. 금방 싫증이 났다. 그렇게 둘은 채 일 년도 교제하지 못하고 이별하게 되었다.
큰 다툼이나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태호의 연락은 이어졌고, 태호는 이따금 그녀에게 관계를 요구했다. 선화는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태호는 집요했다. 결국 한번 관계를 맺고 나서는 첫경험 이후 그러했듯,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이어졌고 곧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오히려 선화가 먼저 연락을 해 만날 때도 있을 정도였다.
태호의 성욕이 파도와 같아서 잔잔하지만 끊임없는 것이라면 선화의 욕구는 아주 가끔씩 몰아치는 태풍과 같았다. 태호는 그런 흥분과 성욕을 아무런 문제 없이 풀 수 있는 상대였다. 그 상대는 비밀을 지킬 줄 알고 절대 거절하는 법이 없다. 거기다 능수능란하기까지 하다.
그런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선화가 태호와 다시 만나지 않는 이유는 태호에게 느끼는 매력이라는 것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태호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집주인이 갑자기 집세를 크게 올렸다. 다른 홀로 사는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선화도 한 달을 벌어 겨우 한 달을 사는데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이사를 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선화는 기분전환을 위해 태호에게 연락을 했고, 어쩌다 집세에 관해 말을 꺼내게 됐다.
태호는 기다렸다는 듯 동거를 제안했다. 물론 서로 어떤 간섭도 방해도 하지 않고, 오로지 월세를 절반씩 부담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둘의 밤에 관해 태호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선화도 태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당장 난처한 일이 생긴다.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동거를 시작하게 됐다.
평소 선화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가만히 조용한 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색을 하는 것을 즐겼다. 완전한 휴식과 고요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선화에게도 일탈의 욕구가 이따금 생기기 마련이다. 그 일탈을 욕구와 맞닿아 있고 그 중심에 태호가 있었다.
그리고 선화는 그러한 일탈의 밖에서 병식을 만났다. 병식은 선화와 닮아 있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으며 감상에 젖을 줄도 아는 남자였다. 태호와는 완전히 달랐다. 선화는 병식이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길 바랐다.
연인의 육체관계라는 것, 그것이 가진 중독성과 그 중독에 이어지는 싫증, 권태, 매너리즘. 특히 남자의 그것이 더욱 심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자꾸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남녀관계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그 관계는 곧잘 위태로워지곤 한다.
선화는 병식이야말로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그런 남자라고 생각했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책과 영화, 작가와 감독에 대해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똑똑하고 지적인 남자, 여자를 배려할 줄 알고 예의가 바른 남자, 인내할 줄 아는 남자, 바로 병식이었다.
물론 병식도 남자인지라 선화를 애타게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병식은 선화가 태호 이후로 처음 진심을 담아 좋아하게 된 남자다. 더욱 조심스러웠다. 병식은 태호처럼 서두르거나 강제로 선화를 어찌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선화는 더욱 병식에게 빠져들었다. 선화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연애,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병식은 선화의 동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그럴 상상조차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화는 단 한 번도 병식의 데이트 제안을 거절한 적이 없으며 안달을 떠는 병식 때문에 일주일에도 서너 번을 만났다. 늦게까지 병식과 함께 있었으며 어쩌다 병식과 있을 때 울리는 전화도 업무상의 전화 혹은 부모님이었다.
거기다 선화는 평소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 그야말로 조신하고 참한 종갓집 맏며느리와도 같았으니 당연히 그런 의심 따위는 애당초 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선화는 동거남 태호가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는 그저 집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진짜 연인, 사랑은 병식이다. 선화는 병식을 속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일 뿐, 단지 이를 언급할 경우 파경은 불 보듯 뻔 한일이니 숨기는 것일 뿐이라고. 언제까지고 태호와 이렇게 살 생각도 없었다.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말이다.
선화의 집은 병식이 만날 바래다주는 곳이 아닌 반대편의 건물이었다. 선화는 병식과 작별하고 병식이 떠나면 반대편 건물로 올라가곤 했다.
그러다 오늘 창가에 놓인 로즈마리 때문에 병식에게 하마터면 진짜 집을 들킬 뻔했다. 안쓰럽게도 병식은 그저 비슷한 화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선화도 병식이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다. 그리곤 집으로 들어와 바로 태호와 거리낌 없이 관계를 맺었다.
비록 관계는 태호와 맺지만 선화는 태호를 병식이라 상상했다. 그럼 기분이 더 좋았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면 이내 다시 병식이 아닌 태호가 돌아왔다. 태호와 함께 몸을 섞을 때면 선화는 자신이 완전한 날 것이 됨을 느켰다. 가면을 벗은 본래의 모습, 아무것도 거리낄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수치심도 없는, 자존심이니 위선이니 없는, 그저 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과 살의 맞부딪히며 본능이 이끄는 그대로의 쾌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선화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