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빈이 강우의 집에 온 그날 낮
화란은 최 이사의 사무실에 함께 있었다.
“ 오랜만이군. 화란아
아니 강 비서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화란이로? “
“ 편하실 데로 불러주세요. ”
“ 그래,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들어와 활약이 대단하다고 들었어.
원중만 전무를 사장으로 올린 것도 네 공이 크다고 하던데.
공부를 마치고 온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네. “
“ 네,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
“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지? 바쁠 텐데 말이야. ”
“ 오늘 서동빈이란 학생이 집에 갈 거예요.
이미 알고 계시죠? 강우 친구 서동빈 “
“ 집에 와있다고 들었어. 그건 왜? ”
“ 알고 계실 테지만
그 학생이 연우에게 호감 그 이상인 것 같고, 너무 가까워지네요. 둘 사이가
잘못하면 최 이사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어요. “
“ 허허허 화란이 너 정말 대단하구나.
강우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그 애를 연우한테 보낼 수 있는 거야? “
“ 강우는 저를 사랑해요.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 번의 연락도 없었지만 강우는 저를 잊지 않았어요.
저는 믿어요. 강우를
우리 관계를 끝내거나 저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강우가 CH 건설의 주인이 되면 다시 찾을 거예요.
강우를 말이에요. “
창 밖을 보면서 화란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난 뒤 긴 호흡을 내쉬었다.
“ 신동빈이란 학생
신애의 장래 사윗감으로 어떠세요?
아직 어리긴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 학생
지켜본 바로는 잠재력이 있어요.
신애랑 같이 미국엘 가서 공부를 더 시켜도 좋고요.
좋은 남편이, 아빠가 돼 줄 거예요.
자연스럽게 연우 옆에서 떼어 놓을 수도 있고
신애도 그 학생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어요.
가난한 학생이긴 하지만 그래서 결혼 생활이 더 편할 수도 있어요.
그 학생 어머님 성품이 좋다고 하네요. “
“ 이렇게 네가 원중만 전무를 사장으로 끌어올린 거구나.
눈치도 빠르고, 상황 판단력도 좋고 다 마음에 든다.
네가 남자였으면 강우 옆에서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래도 네가 우리 강우에게 큰 힘이 돼 주겠구나. “
“ 네, 저는 강우를 위해서라면 모든 다 할 겁니다. ”
“ 그래, 그 점은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강우가 연우랑 결혼을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직 강우한테 물어보진 않았지만 “
“ 이사님은 강우랑 연우를 결혼시키겠죠.
그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우가 CH 건설의 주인이 되면
그때 제가 움직일 겁니다.
모든 것이 변하게 될 거예요. 제 중심으로요. “
“ 내가 강우와 너의 사이를 그냥 두는 건 너희를 허락해서가 아니야.
강우가 연우랑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CH 건설의 오너가 된다고 해도
너는 강우의 아내가 될 수 없어.
내 며느리는 연우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야 해
너는 강우의 그림자로 사는 데 만족해야 한다. 네가 아이를 낳아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럴 수 없다면 강우를 떠나거라. “
화란은 최 이사를 깊이 쳐다봤다.
“ 강우는 이제 어른이 됐습니다.
부모님 뜻을 거역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
“ 강우가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너도 그 아내들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니?
남편의 월급에 맞춰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을 장만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그런 네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니?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아이가 아니야.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건 우리 강우도 마찬가지야.
CH 건설은 재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무조건 가져야 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강우도 너도 행복해질 수 있다.
평범하고 소박한 삶 일상의 행복
그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안일한 위안일 뿐이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도 우리 자식도
연우가 살아있는 한 내 며느리는 연우야.
만약 모든 것이 강우의 차지가 되고 연우가 세상에 없다면
그 며느리 자리는 네가 될 수도 있겠지. 더 이상 연우는 필요 없어지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봐라.
어설픈 시도는 하지 마라. 성공할 자신이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마.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라.
네가 강우의 아내가 될 방법이 있을 거다. “
“ 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서동빈이란 학생은 신애랑 엮어서 미국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그 편이 모두에게 좋습니다.
이미 사람을 붙여 놨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
“ 그래, 네가 얼마나 일 처리를 잘하는지 지켜보마. ”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화란은 최 이사의 사무실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 연우를 치우는 것도 나보고 하라 이거구나.
자기 친구도 그 딸도 모두 제거할 생각을 하네.
강우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어. “
화란은 전에 일하던 업소의 사장 주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주 사장님
잘 지켜보고 있어요? 동빈 학생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돼요. ”
“ 걱정하지 마. 화란아
내가 언제 실수 한 적 있었니? ”
“ 얼마 후에 동빈이가 연우를 만날 거예요.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잘 들어보세요. “
“ 그래, 알았다. ”
화란이 말한 데로
다음 날 동빈은 연우에게 중요한 얘기가 있다며 경복궁에서 만나자고 했다.
카페나 학교에서 보거나 전화를 해도 될 텐데
일부러 고궁을 오라고 하니 연우는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괜히 그럴 동빈은 아니라
신경이 쓰여 서둘러 났다.
“ 여기야. 연우야 ”
“ 오랜만이에요. 경복궁에 오기는
갑자기 여기에서 왜 보자고 한 거예요?
혹시 강우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
“ 아니야, 연우야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연우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보면 안 될까?
강우에 대해서 말이야.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다 해서 모든 걸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우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을 거야.
그래도 너는 강우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데
네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해. “
“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왜 그래요? ”
“ 연우야.
내 보기엔 강우가 너를 정말 좋아하는 거 같지 않다.
그냥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너를 정말 좋아하는 남자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자를 말이야. “
“ 동빈 오빠
나를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 데. 난 알고 있어요.
강우 오빠가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원래 강우 오빠 성격은 차고 냉정한 면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걸요.
하지만 날 챙겨주고 다정한 모습도 있었어요.
나는 강우 오빠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다른 사람이란 연애를 한다거나 결혼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하겠어요. “
“ 그러니까 한번 해보라는 거야.
강우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봐.
너무 한 사람만 봐서 모를 수도 있는 거잖아.
네가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결혼을 그렇게 서두르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니야.
너희 아버지도 원치 않으실 거야.
네가 강우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것 말이야. “
“ 글세요. 정말 그럴 가요? ”
“ 그래, 친구들이 해주는 미팅이나 소개팅도 해보고
보통의 여대생들이 하는 걸 해봐.
그럼 보는 눈이 달라질 거야. “
동빈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연우는 동빈과 대화하고 만남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다정한 그의 말과 행동에 마음이 편해졌다.
강우를 생각하면 항상 조바심이 나고 불안했었는데
동빈을 보고 있으면 따듯한 차를 마시는 것처럼 몸이 훈훈해져 왔다.
“ 연우야, 여긴 웬일이야? “
“ 어? 강우 오빠, 오빠 여긴 왜? “
“ 동양 건축에 관해 리포트를 쓸 일이 있어서 말이야.
여긴 동빈이랑 왠일이야?
“ 아, 오빠가 급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요. ”
“ 내가 너희 둘을 방해했나 보구나.
네가 동빈이랑 이렇게 친한 줄은 몰랐네.
저기서 보니 아주 다정해 보이더라. 너랑 동빈이 말이야. “
“ 동빈아, 미리 말하지 그랬어?
이런 곳에서 연우랑 따로 만날 정도라면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연우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내가 이것저것 데이트 코스며
연우가 좋아할 만한 걸 미리 알려줬을 텐데.
맛있는 것도 사주고, 즐겁게 해 줘.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 “
“ 어?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강우 오빠, 그런 거 아니에요. “
강우는 성큼성큼 둘의 앞을 지나갔다.
“ 동빈 오빠, 어서 가서 강우 오빠 좀 잡아줘요.
가서 얼른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의논할 게 있어서 나온 거라고
오빠가 나를 좋아하는 건 오해라고 빨리 말해줘요. 어서요. “
“ 아니, 연우야, 오해가 아니야.
강우 말대로 나는 널 좋아해.
이젠 말해야겠어. 너도 이제 알아야 하고
네가 생각하는 강우랑 진짜 강우는 다른 사람이야.
강우에게는 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어.
화란이라고 알지? “
“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화란 언니를? ”
“ 그 둘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고 깊은 관계야.
강우 부모님도 신애도 모두들 다 알고 있어. 너만 빼고 말이야.
다들 너랑 강우가 결혼하길 바라고 있지.
상속받을 네 재산 때문에 말이야.
너 아직도 모르겠어? 강우는 너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은 바보가 돼 버려.
강우 앞의 너처럼 말이야.
강우가 너 앞에서 한 번도 겁을 먹은 적 있니?
강우가 너를 두려워한 적이 있었니? 너처럼 그렇게 말이야.
네가 화가 났을까 봐. 너랑 헤어질까 봐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너무 바빠서 몸이 상할까 봐
너를 걱정해준 적 있어?
강우는 항상 네 앞에서 당당하고 멋있기만 했을 걸
언제가 주눅 들고, 걱정하고, 안달했던 건 항상 너였을거야.
연우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노예가 되고, 약자가 된다.
네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편하게만 행동한다면 그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단 증거다.
난 네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그게 나였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아.
너를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난다면 말이야.
오늘 집에 가서 잘 생각해봐.
강우가 정말 너를 사랑하는지 말이야. “
동빈의 말을 듣고 연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동빈의 말이 맞다면
강우는 연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 모든 것이 다 혼란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