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이사는 이른 새벽 휴대폰 벨소리에 잠이 깨어
강우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사체가 보관된 양평의 병원으로 향했다.
시체는 까맣게 타 버려 강우라고 확인할 수 없다고 최 이사는 소리를 질렀지만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취업을 기념해 최 이사가 선물한 시계가 분명했다.
최 이사는 자신의 아들이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 뒤 심장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양평의 병원에서는 심장마비와 뇌경색을 처치할 수 없어 서울로 긴급 이송했고
최 이사는 앰뷸런스 안에서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아침에 깨어난 지윤과 지석이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강석의 의식은 회복했지만 그의 전신과 얼굴의 오른쪽은 일그러지고 뒤틀려있었다.
“ 환자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계속 재활치료받으시고, 움직이시면 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요. ”
의사는 그나마 병원에서 쓰러진 것이 다행이라고
집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으면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주범 화란과 공범 강우의 사망, 최 이사의 건강 이상으로
구속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 사장은 고소를 취하 하자고 법무팀과 주주들을 설득해
최 이사의 파면으로 마무리 지었다.
신애와 강우의 죽음
말자의 정신이상
최 이사의 심장마비와 뇌경색
모두 일 년 동안 발생했고, 강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버렸다.
최 이사는 요양원으로 실려 갔고, 실어증에 걸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강석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루종일 멍하니 창 밖만 쳐다봤고
지윤과 지석은 말자와 최 이사를 가끔 찾아가다 발을 끊었다.
무능력하고 부모와의 연을 끊은 지윤과 지석 대신에
말자와 최 이사의 병원비는 모두 우 사장이 지불하기로 했다.
지윤과 지석은 살고 있는 집이 무섭다며 아파트로 이사를 나갔고
다시는 연락도 하지 않았고,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연우의 엄마 윤희와 우 사장은 동빈 모에게
강우네 집에서 사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동빈은 경주에 가고 없지만 새 집을 얻어 나가지 말고
연우네와 옆 집에 나란히 살자고 했다.
거듭되는 제안에 유빈이네는 이사를 했고 별채는 비어졌다.
연우는 가끔씩 별채로 가 동빈의 방에 들어갔다.
동빈이 그리웠지만
미안하고 복잡한 심경에 그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우의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에 동빈은 경주로 내려갔고
내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올라오겠다고 했다.
연우는 상처 받았을 동빈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그가 자신을 받아줄지 겁도 나고 자신도 없었다.
“ 엄마, 우리 내일 제주도 고 할머니 댁에 가자. ”
“ 갑자기? 왜? 이 추운데 바람이 심한 제주도를? ”
“ 응, 할머니를 못 본 지 오래라 고 할머니가 보고 싶어. ”
“ 엄마가 지금 감기 기운이 있어서 갈 수는 없고
너 혼자 다녀오는 게 어때? ”
“ 그럴까?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엄마는 좀 쉬고 있어. ”
“ 그래, 연우야
혼자 가기 무서우면 정 비서랑 같이 다녀와도 되고. “
“ 아니야, 혼자 갔다 올게 아빠
아빠, 윤희 요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있는데
전에 내가 다쳤을 때 날 도와준 적 있어. “
“ 네가 다친 적이 있었다고? 언제? ”
“ 1학기 때 친구들이랑 여행을 갔다가 조금 다쳤는데
그 간호사가 친절하면서도 느낌이 좋았어.
신입 간호사라 어린데도 말이야.
김 지현 간호사인데 나중에 요양원의 원장이나 책임자가 돼도 좋을 것 같아. “
“ 원장을 여자 간호사로 취임시키자고? ”
“ 아니, 나중에 그 간호사가 일을 잘하면 말이야.
나이도 어느 정도 들어야지 ”
“ 그래, 아빠가 잘 기억하고 있을 게.
네가 신세를 크게 진 모양이구나. “
“ 응 ”
연우는 고 할머니가 있는 제주도에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윤희 요양원에 있는 지현을 만나서 감사 인사를 하고
경주에 있는 동빈도 살짝 보고 싶었다.
점심시간쯤 윤희 요양원에 도착해 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는 지현에게 다가갔다.
“ 안녕하세요 ”
“ 네? 안녕하세요. 환자 보호자이신가요? ”
“ 아니요, 경치가 좋고 시설이 좋은 곳이라 들렀어요.
우리 할머니를 여기서 모시면 어떨까 해서 한번 구경 왔어요. ”
“ 와~ 손녀 분 마음이 참 예쁘네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보통 자식들이 오는 데 ”
“ 김 선생님, 감사해요. ”
“ 왜? 갑자기? 저한테? ”
“ 전에, 아주 오래전에 김 선생님이 저를 도와준 적이 있어요. ”
“ 네? 제가요? 전 그쪽을 처음 본 것 같은데요. ”
“ 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으실 거예요.
저, 이거 받으세요. “
“ 네? 아니요. 전 받을 수 없어요. ”
지현은 손을 절래 절래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 이런 거 받으면 큰일 나요. ”
“ 저는 환자도 환자 보호자도 아니니까 받으셔도 돼요.
이건 제가 그냥 개인적으로 과거에 신세를 져서 드리는 거예요.
비싼 것도 아니고, 우리 할머니가 주신 목걸이예요.
꼭 받아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
“ 아이 참~ 네, 그럼. 근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죠?
낯은 익는데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
“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날 거예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해요.
이 목걸이 항상 잘 착용하고 계세요.
보기엔 초라해도 영험한 영이 담긴 목걸이라
김 선생님을 꼭 지켜 줄 거예요.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그 목걸이가 한 개의 소원은
꼭 이뤄준다고 하셨어요. 우리 할머니가 “
“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
“ 그럼, 이만.
아~ 참, 그리고 나중에 결혼을 하시면
남편 분한테도 감사했다고 꼭 전해주세요.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말이에요. ”
연우는 지현을 떠나 요양원 정원을 지나고 있었다.
“ 저~ 그쪽 이름이, 이름이 뭐예요? 좀 알려주세요. ”
“ 연우, 우 연우 제 이름은 우 연우예요. ”
“ 네, 안녕히 가세요. 연우 씨 ”
지현은 데스크로 돌아와 연우의 이름을 곱씹었다.
‘ 내가 아직 미스인데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없는 남편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래?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나?
참 이상한 사람이네. 멀쩡하게 생겨 가지곤
연우, 연우, 연우, 우연우
어? 연우 재단? 우 민우 사장 딸 우 연우
나한테 장학금을 준 연우 재단의 그 우 연우 인가? ‘
지현은 너무 놀라 다시 연우에게 달려갔다.
연우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과거에 연우를 만난 기억이 있는지 떠올려봤다.
‘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아이~ 모르겠다. 언제 한번 만난 적이 있었나 보지. ‘
지현은 데스크로 돌아와 차트를 정리했고
연우가 준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다 웃음이 나왔다.
‘ 참 재미있는 아가씨네.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겠지. ‘
연우는 차를 운전해 동빈이 있는 경주로 향했다.
동빈의 집으로 가니 집은 텅 비어 있었고
항상 마음이 복잡하면 가던 저수지에 동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살은 조금 빠졌고, 더벅머리에 면도도 안 했는지
까칠해진 동빈이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너무 반갑기도 하고, 웃음이 나와 “ 동빈 오빠 ” 부르려다
복숭아나무 뒤로 연우는 몸을 숨겼다.
해가 질 때까지 동빈은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물고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던 지 잡았던 물고기는 다시 풀어주고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만 내쉬고 있었다.
동빈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연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한 참을 망설이다 다시 길을 떠났다.
배를 타고 제주로 가면서
연우는 강우와 화란, 신애, 말자, 최 이사를 생각했다.
아버지와 엄마, 딸 선아와 아들 선우를 죽이고
연우를 정신 병원에 가두고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이제 그들 모두에게 받은 그대로 되 갚아 주었다.
복수가 끝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연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강우는 이제 죽었으니
선아와 선우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선아와 선우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걸까? ‘
연우는 선아와 선우가 보고 싶어 눈물이 흘렀다.
‘ 선아야 선우야 보고 싶어.
엄마가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어.
다시는 너희들을 볼 수 없는 걸까?
엄마가 아빠를 용서했다면 그랬다면 너희들을 다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엄마는 그럴 수가 없었어.
복수에 눈이 뒤집혀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버렸어.
너희들을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빠를 용서했어야 했는데 엄마는 그러지 못했어.
선아야 선우야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아. ‘
밤새 연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 우느라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퉁퉁 부어 있었다.
동이 틀 무렵 배는 선착장에 도착했고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고 할머니는 연우를 마중 나와 있었다.
“ 할머니, 연락도 안 드렸는데 제가 오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
“ 아기씨가 온다고 용왕님이 다 알려주셨습니다.
고생이 많았지요? 얼른 들어갑시다. 바다 바람이 찹니다.
전복죽 끓여 놨으니까 드십시다. “
고 할머니는 연우를 꼭 껴안고는 집으로 데려갔다.
“ 할머니 ”
전복죽을 먹다 연우는 울음을 터트렸다.
“ 아기씨, 우리 아기씨
다 울고 가세요. 후련하게 다 울고 가세요.
후회하지 마세요. 아기씨가 한 일들을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한 겁니다.
사필귀정
일어날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게 운명이라는 거지요. “
연우는 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 할머니, 보고 싶어요.
내 딸 선아. 내 아들 선우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그 애들을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다 망쳐버렸어요.
우리 아기들을 볼 수 없도록 다시 만나지 못하도록
내가 눈이 뒤집혀서 돌아버려서 모조리 망쳐버린 거예요.
이제 우리 아기들을 다시는 보지 못해요.
할머니, 죽고 싶어요.
다 끝내고 나니 이제야 내 새끼들이 떠올라요.
할머니. 어쩌면 좋아요?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요? “
“ 아기씨
부모랑 자식 인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기씨랑 아기씨 애기들은 분명 다시 만날 겁니다.
내 반드시 약속하지요.
아기씨랑 아기씨 애기들이 분명 다시 만날 거라는 걸 “
“ 그렇죠? 그렇죠? 할머니 우린 분명 다시 만날 거죠? ”
“ 걱정 마세요.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
아기씨, 지금 아기씨 마음에 들어 있는 그 남자를 꽉 잡으세요.
그 남자는 우리 아기씨랑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씨와 아기씨 애기들이 다시 만날 수 있어요. “
“ 네? 동빈 오빠를 만나야 그래야 우리 아기들을 다시 볼 수 있다고요? ”
“ 네, 그렇습니다.
그 남자분은 아기씨 옆에 있게 하려고
용왕님이 보내주신 남자분이에요.
이 전복죽 다 드시고 나면 얼른 가세요. 그 남자분한테 “
“ 네, 할머니 다 먹고 얼른 갈게요.
우리 아기들을 우리 선아 선우를 볼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할머니 고마워요. “
고 할머니는 연우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냈다.
연우는 죽을 다 비운 후 그대로 공항으로 향했다.
“ 아기씨, 꼭 그 남자분이랑 다시 오세요.
내년 겨울 쯤 좋은 일이 아기씨한테 생길 겁니다. “
“ 할머니, 동빈 오빠를 데리고 반드시 올게요.
우리 아기들을 만나려면 오빠가 필요하니 꼭 다시 만나 함께 올게요. “
고 할머니는 연우가 타고 있을 비행기를 향해 기도를 하고 또 기도를 했다.
‘ 용왕님, 우리 아기씨랑 아기씨 애기들을 꼭 지켜주세요.
고생만 한 우리 연우 아기씨를 다시 힘들게 할 수는 없어요.
용왕님이 지켜주세요. 우리 아기씨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