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희야, 나왔어. ”
“ 어, 그래 ”
“ 너 몸이 안 좋다고. 어제 우리 강우 아빠가 걱정하길래.
연우 아빠랑 어제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네가 아파서
일찍 들어갔다고 해서 “
“ 어, 별일 아니야.
연우 아빠는 내가 아프다고 하면 신경이 곤두서서,
어제도 일 보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일찍 왔네. “
“ 지금은 괜찮아? ”
“ 응, 괜찮아. ”
“ 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
“ 응? ”
“ 연우가 말한 데로, 내가 연우랑 너를 홋카이도에
가게 부추겼다고 말이야.
우리 지석이가 자꾸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정신도 없고, 잠도 부족해서 이름이 잘못 나온 거 같아.
요새 내가 안 하던 실수를 하네 “
“ 그래, 그랬겠지. 네가 일부러 그랬겠니?
내가 아프고 입원할 때마다 네가 나 대신 우리 연우
잘 돌봐 준거 알아. “
“ 그럼, 내가 연우를 돌봐준 게 연우 돌 때부터였는데.
너 툭하면 쓰러지고 입원하고, 얼마나 고생했니?
그때마다 연우를 내가 우리 신애랑 똑같이 키웠지.
유치원, 초등학교 때도 내가 학부모 상담이니 엄마들 모임. 다 나가서 너 대신했잖아.
연우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야.
강우 아빠도 연우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
“ 그래, 알아.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 연우는? ”
“ 자기 방에 있어. ”
“ 뭐 하고 있는 데? ”
“ 응, 지금 공부하고 있어. ”
“ 어? 연우가 공부를 해? 이게 왠일이야? ”
깜짝 놀란 말자가 놀라서 윤희를 쳐다봤다.
“ 우리 연우가 이제 철이 들려나 봐.
맨 날 강우만 찾아 대다가. 어제 갑자기 자기도 공부해야겠다고 선생님을 좀 붙여 달라고 하네.
이제 중학생이 되니까 공부를 해서 대학엘 가야겠데.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강우한테 시집가겠다고 노래를 하더니
어제부터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공부하고, 책도 보고.
이게 웬일 인가 싶으면서도 기특해.
딸이지만 일찍 시집보내긴 싫었거든.
연우 아빠도 좋아하는 눈치야. 아들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딸이라도 똑똑하면 연우 아빠 뒤를 이어서 일할 수도 있고 말이야. “
“ 어? 그럼, 그렇지.
딸이라도 영특하면 되는 거지. 잘 됐다.
연우가 철이 들어서. “
“ 말자야,
주변에 좋은 과외 선생님 알고 있니?
연우 가르칠 선생 말이야.
너는 잘 알고 있겠지만 알다시피 나는 잘 모르잖아.
학원을 보내자니 연우가 학원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선생님을 붙여 달래. “
“ 연우가 그렇게 까지 말해? ”
“ 응, 놀랍지? ”
“ 그래, 내가 한번 알아볼게.
신애 선생님한테 부탁해도 되고,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 엄마들 통해서 함 알아볼게. “
“ 아줌마, 오셨어요? ”
“ 어, 연우구나.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고? ”
“ 네, 그래야죠.
언제까지 놀 수만은 없잖아요? 신애도 공부하고 있죠? “
“ 응, 신애는 지금 선생님이랑 수업 중이야.
한 시간 뒤쯤 수업이니까 놀러 와도 돼.
강우도 집에 있어. 오빠 보고 싶으면 지금 가봐. “
“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이 있어서 다음에 갈게요.
시간 될 때 놀러 갈게요. 오빠도 이제 고 1인데 공부해야죠. ”
“ 그래라, 그럼. 시간 될 때 와. ”
“ 아줌마, 화란 언니는 괜찮아요? ”
“ 어? 화란이는 갑자기 왜? ”
“ 저번에 아줌마네 갔을 때 코코아를 엎지르면서
화란 언니한테 코코아가 튀었거든요.
그때 다치지 않았나? 걱정스러워서요. “
“ 아~ 괜찮을 거야. ”
“ 화란이? 화란이가 누구야? ”
“ 응,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 딸이야. ”
“ 화란이 언니라고 내가 아줌마네 갈 때마다 자주 보는데.
아줌마. 화란 언니가 대학생이라고 했죠? “
“ 응, 대학교 2학년이야. ”
“ 화란 언니 정말 예쁘게 생겼어. 키도 크고 늘씬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인기가 정말 많았데.
지석 오빠가 화란 언니 좋아했다고 신애한테 들은 것 같았는데.
언제 한 번은 화란 언니 때문에 강우 오빠랑 지석 오빠랑 몸싸움까지 했어.
내가 골목길에서 봤는데 깜짝 놀랐잖아. “
“ 어? 강우가 그 여자애 때문에 형이랑 싸우기까지 해?
너 알고 있었니? 말자야. “
“ 아니, 나 처음 듣는 말인데. 정말이니? 연우야. ”
“ 네, 강우 오빠 중학교 입학 얼마 앞두고 둘이서 싸웠어요.
내가 선물가게에서 강우 오빠 중학교 입학 선물 사고 오는 길에 봤거든.
무서워서 건네주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어. “
“ 강우가 화란이라는 그 여자애를 정말 좋아하나 보네.
여자 애 때문에 싸울 애가 아닌데. 강우가 “
“ 연우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우리 강우가 도우미 아줌마 딸을 왜 좋아하니?
그렇게 눈 낮은 애 아니야. 우리 강우 “
말자는 자기도 모르게 연우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집안일 하는 아줌마 딸을 좋아하면 눈이 낮은 거예요?
그럼 가정부 아줌마 딸들은 연애도 결혼도 하지 못하겠네요. 아줌마 ”
연우가 말자에게 빈정거리며 말하자 말자는 당황을 하고, 윤희는 깜짝놀라 연우를 바라봤다.
“ 아? 아니, 화란이는 우리 강우가 좋아할 타입이
아니란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강우가 너를
동생처럼 얼마나 귀여워하니?
겉으로는 냉랭하게 굴어도 집에서는 맨날 니 칭찬을
자주 해.
예쁘고 귀엽다고. 네가 고등학교 졸업해서 어른 되면
너랑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일찍 하고 싶다고
종종 얘기해. 연우야, 아마 네가 아마 잘 못 본 걸 거야. “
“ 저는 졸업해서 결혼할 생각 없어요.
강우 오빠든 다름 남자든
열심히 공부하고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좋은 기업인이 될 거예요. ”
“ 연우 네가?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겠다고?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 내가 당황스럽네.
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연우야
나 그만 집에 가봐야겠다. 애들 간식 좀 챙겨줘야겠어. “
“ 네, 아줌마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제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
연우는 단호하게 자신의 말을 끝낸 뒤 쌩하니 뒤돌아 방으로 갔다.
연이은 연우의 충격 발언에 말자는 식은 땀이 흘렀다.
“ 잠깐만. 나 할 말이 있는데 앉아봐.
말자야, 우리 친구지? 그렇지? ”
“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윤희야? ”
” 어제 홋카이도 여행건은 네가 분명히 실수한 거지? 맞지?
네가 일부러 그랬다고 내가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지?
우리가 친구라고 계속 생각해도 되는 거니? “
“ 내가 실수한 거 맞다니까. 넌 나를 그렇게 못 믿니? 섭섭하다. 윤희야. ”
“ 그래, 네 말을 믿을게.
하지만 그런 실수는 앞으로 다시는 하면 안 돼. 알았지? ”
윤희의 단호한 표정으로 말자에게 명령했다.
“ 그럼. 어제 일은 분명 내 실수니까 잊어. 나, 그만 갈게. ”
“ 그래, 조심해서 가라. ”
당황한 말자는 일어섰고, 윤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말자를 배웅하지도 않고 책을 들었다.
‘ 윤희가 아무래도 눈치를 챈 거 같은데.
연우도 변한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강우 아빠가 알면 난리가 나겠네. '
말자는 마음이 싸해지자 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져 옷길을 여미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 연우야, 너 괜찮아? ”
“ 응? 엄마, 뭐가? ”
“ 너, 강우 좋아하잖아? 어릴 때부터 강우한테 시집간다고, 아빠보다 강우가 더 좋다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학 안 가고, 바로 강우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
“ 엄마, 내가 아무리 아빠보다 그 오빠가 좋겠어?
좋다고 한 들 그건 어릴 때 얘기지. 나도 이제 중학생인데
남자한테 내 인생 전부를 걸 만큼 그렇게 어리지 않고, 어리석지도 않아.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아빠가 세운 회사도 내가 물려받아야지.
딸이라고 아빠가 세운 회사 이어받지 못할 것도 없잖아.
만약 나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회사를 경영해도 되고.
열심히 노력해서 유능하고 실력 있는 기업인이 될 거야.
엄마. 내 걱정하지 말고. 엄마 건강이나 챙겨.
나한텐 엄마랑 아빠가 제일 소중하니까. “
연우는 엄마 품에 안겨 윤희의 젖가슴에 얼굴을 비벼댔다.
“ 언제 이렇게 컸니? 연우야, 내 새끼 내 아가 “
“ 엄마, 엄마라고 부를 수 있어서, 내 옆에 있어줘서, 나를 안아줘서 너무 좋아.
엄마, 아빠 속상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소중한 내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 “
“ 얘가 왜 이래? 뭘 잃어버려?
어제부터 너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하니?
그래도 좋다. 연우야.
엄마는 네가 강우한테 빨리 시집간다고 해서 너무 섭섭했었거든
말자가 물론 잘해주겠지만 결혼해서 살다 애 낳고 하면 자기 인생은 없어져.
엄마가 그렇게 살았으니까
물론 너를 낳아서 행복했지만 만약 내가 몸이 조금
더 건강했더라면 아빠를 돕든 뭘 하든 일을 했을 거야.
너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했어.
우리 연우가 나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너무 좋아.
연우야, 결혼 안 해도 좋아. 너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다 하고 살아.
강우든 다른 사람이든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결혼 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 응, 엄마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
“ 엄마는 연우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이렇게 우리 연우가 철이 들었는데 엄마가 연우 말을
다 따라줘야지.
엄마가 힘이 난다. 아프지 말고 오래 살아야겠다.
성공한 내 딸 연우를 보려면 “
“ 응, 엄마. 내 옆에서 오래오래 살아. 알았지?
사랑해. 내가 앞으로 엄마한테 더 잘할게. ”
“ 우리 연우가 안 아프고 건강하면 엄마는 그걸로 만족해.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
“ 응, 엄마. 난 정말 정말 행복해.
보고 싶을 때 엄마를 보고, 만질 수 있고, 엄마 냄새까지 맡을 수도 있잖아.
엄마 냄새 너무 좋아. 이 냄새가 너무 그리윘어.
나 이제 올라가서 공부할게. ”
“ 그래, 배고프면 엄마한테 말해. ”
“ 배고프면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엄마는 쉬어.
나 신경 쓰지 말고 ”
‘ 언제 우리 연우가 저렇게 컸을까?
꼭 딴 사람이 된 거 같네. ’
윤희는 연우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 사모님, 우리 연우 아가씨
왜 이렇게 변했데요? 정말 놀라겠어요. “
“ 그렇죠? 아줌마. 아줌마가 봐도 그렇죠? ”
“ 네, 요 며칠 아주 싹~ 바뀌고, 딴 사람이 된 거 같아요.
자다가 무슨 꿈을 꾼 건가?
어떻게 하룻밤 새에 사람이 저렇게 바뀌지?
참, 신기하네. 그래도 다행이에요. 사모님
저는 연우 아가씨, 저 집 사모님 셋째 아들 좋아하는 거 별로였어요.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사모님 매일 누워 계시고,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종종 저 집 사모님이랑 자녀분들 와서 말하는 거 들어보면
사장님이랑 사모님이랑 생각하시는 거랑은 완전 다른 사람이에요. “
“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두 분이랑 친한 분들이셔서 그렇지, 천성이 선하고
좋은 분들은 아니에요.
저는 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어요.
좋은 척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사람은 다른 거예요.
쓰레기를 포장지에 넣는다 한들 악취가 사라지지 않고
매화꽃을 방구석에 숨겨 놓아도 그 향은 온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되는 법이에요.
사람은 저마다의 냄새가 있어요.
그 집 사람들이 풍기는 냄새를 저는 썩 맡고 싶지는 않네요.
게다가 우리 아가씨만 혼자 저 집 도련님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 애가 닳고, 속상했는데.
잘됐어요. 우리 아가씨가 이제 총기가 생겼네. “
“ 아줌마, 저 집 사람들 오랜동안 우리 연우 잘 돌봐준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거 듣기 좋지 않아요. “
“ 아이코, 죄송해요. 사모님
말이 길어지다 보니.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
“ 그래요. 아줌마가 우리 연우 예뻐하는 거 아는데
내 친구고, 우리 남편 친구이기도 하니까 밖에 나가서는 말조심해야 해요.
나야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니까.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인지 알지만
여하튼 말이라는 건 항상 조심해야 해요. “
“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
윤희는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연우의 말도, 도우미 아줌마의 말도 모두 윤희가 짐작하고 느낀 그대로였다.
말자네는 오랜 시간 윤희의 가족 곁에 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찜찜하고 개운치가 않았다.
윤희와 남편 둘 다 외동이라 속을 드러내고 믿을 만한 친척들은 하나도 없었다.
친척들과 왕래도 하고 연락을 하긴 했지만 말만 친척이지
모두 민우의 회사에 자식들 취업이나 돈을 빌리러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윤희는 전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여보. 나예요. ”
“ 응, 그래 ”
“ 오늘 늦어요? ”
“ 아니, 끝나고 바로 들어갈 거야. 왜? 무슨 일 있어? ”
“ 별 일 아닌데. 요새 우리 연우가 좀 이상해요. ”
“ 연우가? 어디 아파? ”
“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애가 좀 바뀐 것 같아요. ”
“ 난 또 뭐라고. 이제 철이 든 거지. 잘 됐는데 뭘 걱정하는 거야. “
“ 그렇죠. 여보? 잘 된 거죠? ”
“ 그럼 걱정하지 마. 우리 연우가 바뀌어서 난 좋기만 해. ”
“ 알았어요.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
“ 쉬고, 한약이나 잘 데워 먹어요. ”
“ 네, 일 보고 들어와요. ”
윤희는 바뀐 연우를 보고 웃음이 났다.
‘ 그래, 잘 된 일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