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 14.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내다

by 옥상 소설가

처음 화란을 본 것은 강우가 6살 때였다.

강우의 집에 입주 도우미로 들어온 아줌마는 10살 난 딸 화란을 데리고 들어왔다.

화란을 처음 본 순간

어린 강우는 화란이 여름 수국 같다고 생각했다.

하얀색, 보라색, 분홍색의 동그란 수국

탐스럽고 화려하지만 냄새가 나지 않는 수국

화란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었다. 어린 화란은 메말라있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유치원에서 가장 예쁘다는 솔미가 초콜릿을 주며 강우에게 고백을 하자


“ 나는 너 안 좋아해. 귀찮게 따라다니지 마. “


자기도 모르게 화란이 갑자기 떠올라

단호하게 말했고, 무안해진 솔미는 ‘ 우왕~ ’ 눈물을 터트렸다.


강우는 한 번도 화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화란도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면서도 어느 누구와 대화하지 않았다.

강우의 부모님이 질문을 할 때 간단히 대답만 할 뿐

화란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의 봄날 아침

말자와 아이들이 아침밥을 먹다 지석이 화란에게 물었다.


“ 화란이 누나

누나, 우리 큰 누나랑 같은 고등학교 다니지? ”

우리 지윤이 누나 3학년인데, 누나도 3학년이잖아?

누나 몇 반 됐어? 우리 누나는 3 반인데. “

“ 야, 지석이 너 조용히 해.

밥 먹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가뜩이나 짜증 나는 데.

세상에, 가정부 딸이랑 같은 학교, 한 반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어딨어?

아휴~~ 짜증 나.

엄마, 나 전학시켜줘. 아니면 쟤를 전학 보내든가.

쟤랑 1년을 어떻게 같은 반에서 지내? “


“ 지윤아. 일 년만 참아.

너랑 아줌마 딸이 한 반이 된 게. 나는 뭐 좋은 줄 아니?

그래도 어떡하니? 내년에 운이 좋으면 다른 반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요란 떨면서 전학 가거나 화란이 전학 보내지 말라 구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아버지 앞에서 이런 소리하면 너 뼈도 못 추려? 그 성질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버지가 항상 말하잖아.

어디서든 조신하게 착하게 모범생처럼 행동하라고

돈 없고 무식한 사람들한테 잘해 주라고.

많이 배우고, 돈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못 배우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해줘야 하는 거야.


당장 화란이 봐 바. 얼마나 불쌍하니?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랑 같이 남의 집 더부살이로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눈치 보이고, 서러운지 알아?

인정 많고, 사람 좋은 내가 거둬주니 다행이지.

너희들은 다 행운인 줄 알아.

내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주잖아. 감사히 생각해라.

아줌마, 속이 타네. 나 콩나물 국 좀 더 줘. “


강우는 화란의 반응이 궁금해 물끄러미 화란을 쳐다봤다.

화란의 얼굴이 벌게지며 이를 악물었는지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 네, 사모님 ” 영자는 화란의 옆구리를 ‘ 쿡 ’ 찔렀다.

말자의 국그릇을 받아 엄마에게 주고 화란은 쌩하니 부엌을 나갔다.

“ 어머, 화란이 쟤 지금 지 기분 나쁘다고 저렇게 나가는 거야? 버릇없이? ”

“ 아니에요. 사모님. 등교 준비해야 해서 나간 거예요.

얼른 저희가 돈을 벌어서 나가 살아야 할 텐데. 죄송하고 감사해요. 사모님 ”


화가 난 말자가 화란을 세워 혼을 내려고 하자, 영자는 얼른 말자의 기분을 풀어줬다.


“ 아, 내가 참아야지. ” 말자는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게걸스레 먹었다.


화란은 정원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향하면서 반드시 이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어떻게든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화란은 지윤 보다 일찍 출발하거나 늦게 출발해서 교실 내에서도 서로 마주치지 않게 신경을 썼다.

화란 역시 강우의 누나 지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이 집안 식구들 모두 싫었다.

그나마 가끔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강우는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도우러 강우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강우의 아버지 강석이 맏이 지석보다 둘째 강우를 더 듬직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화란도 알아차렸다.

지석은 아둔하고 경박해 큰 아들 노릇을 하지 못했다.

강우는 또래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아 데리고 다니면 강석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까지 좋으니

아들 잘 둬서 부럽다는 주변의 말들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중학교 2학년인 강우의 키는 180이 훌쩍 넘었고, 어깨도 넓어지며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왔다.

소년은 변성기를 지나면서 목소리도 걸쭉해져 제법 남자다워지기 시작했다.

강우가 계속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눈치가 빠른 화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화란은 강우의 시선을 늘 의식하며 행동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강우의 곁에 다가갔다.

그때마다 강우는 당황하지 않고 화란의 눈길을 그대로 받았다.

화란과 강우의 눈 맞춤은 번번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늘씬하면서도 예쁜 여고생으로 소문이 난 화란은

하교 시간 정문 앞에 항상 진을 치고 있는 남학생들의 소란스러움이 귀찮아 후문을 이용했다.

그날도 남학생들을 피해 모자를 쓰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너는 항상 남자애들을 달고 다니냐? ”


깜짝 놀란 화란이 뒤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1학년 지석이었다.


" 내가 너 보다 두 살이나 많아.

아는 체하지 말고, 정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누나라고 불러. “

“ 누나 좋아하네?

네가 왜 내 누나냐? 나는 큰 누나한테도 누나라고 안 불러.

너 남자 친구 있냐? 없으면 내가 네 남자 친구 해 줄까?

가정부 딸이 부잣집 아들하고 사귀면 성공한 거 아니냐? 내가 잘해줄게.

너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많을 것 아냐?

내가 다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 “


“ 웃기고 앉아 있네. 내가 왜 너랑 사귀어? 너같이 한심한 새끼랑.

지 아버지한테 무시당하고, 동생들도 우습게 생각하는 찐따 같은 새끼를

내가 머리에 충 맞았니? “

“ 뭐? 이게 진짜 여자라고 봐줬더니 죽으려고 환장을 했네. ”

눈이 돌아간 지석이 화란을 때리려던 찰나

누군가 지석의 손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눈을 감고 지석의 손을 피하려던 화란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형, 그만해. 진짜 한심하다.

여자나 때리려 들고. 그러니까 맨날 지질하다고 그러는 거야.

이제 그만 하고, 사람 구실 할 때도 됐잖아. “


강우였다. 강우는 형 지석의 오른손을 잡고 차분하게 형을 쏘아보고 있었다,

자기보다 두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손을 잡히고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지석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 너, 내가 형인데.

아버지랑 엄마만 믿고 이렇게 싸가지 없이 행동하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데로 다 될 것 같아? “

“ 모르지? 나는. 내가 원하는 데로 될지 어떻게 될지.

그래도 하나는 알고 있어. 아버지가 형을 부끄러워한다는 거.

형도 알고 있잖아?

아버지가 회사일이나 모임이 있는 자리에는 형 말고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신다는 걸

왜 그러시겠어? 내가 이렇게 다 말해줘야 해? “


“ 이 자식이 넌 내가 우습지?

아무리 그래도 넌 둘째야. 내가 장남이라고. “

“ 장남,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아버지가 형을 장남으로 생각하면

창립 기념일이나 회사에 일이 있을 때 왜 나를 데리고 다니겠어?

말 그대로 형이 우리 집 장남인데.

매일 ‘ 못난 놈 ’ 하면서 못마땅하게 쳐다보시는 거, 형은 정말 몰라? “

“ 뭐? 이게 정말. ”

“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돼. 형은 나한테.

머리도 안 좋고, 눈치도 없고, 사람들 모두 다 알고 있어.

아버지가 형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 그래, 그게 다 네가 잘나서 그럴까?

아버지가 너를 자랑스러워한다고? 너야 말로 착각하고 있구나.

아버지는 네가 아니라 연우가 좋아하는 너를 아들로 생각하는 거야.

만일 연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네가 아닌 나라면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겠지.

착각하지 마. 강우 너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놈이 아니야. “


“ 연우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나는 상관없어.

걔랑 상관없이 나는 CH 건설의 후계자가 될 거니까.

형이 CH 건설을 갖고 싶다면 연우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연우 따위는 필요 없어.

내 손으로 내 힘으로 그렇게 만들 거야.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제발 CH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부탁하게 만들 거야.

형은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돈이나 받고 평생 살아. “

강우는 지석의 팔을 ‘ 훽 ‘팽개쳐 버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책가방을 화란에게 건네주며 지나가 버렸다.

지석은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씩씩 거리다 사라졌다.


화란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화란보다 4살이나 어리지만 항상 차분하고 영리한 아이

상황을 냉정하게 읽을 줄 알고,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주변을 만들어 가는 아이

그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들을 줄 수 있는 아이

그녀의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가 강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란은 강우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 고마워. 강우야 “


강우는 뒤를 돌아 화란을 쳐다봤다.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 고마워. ”

“ 고마워할 필요 없어. 별 일 아니니까. ”

“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이번엔 내가 너한테 신세를 졌으니까. ”


강우는 걸음을 멈추더니 화란에게 다가갔다.


“ 네가 좋아서 그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언젠가 한 번은 할 일이니까. “

“ 너도 형이랑 똑같구나.

내가 너보다 5살이나 많아. 누나라고 부르지. “

“ 나이 많은 대접받고 싶으면 어린애들한테 가. 누나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너도 날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

어리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그렇게 빤히 노골적으로 보는 여자는 없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


“ 너 재미있다. ”

“ 난 네가 재미있는데. ”


강우는 화란을 향해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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