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없는 감각과 결과 논리의 인지부조화
“이거 리브랜딩 느낌으로 급하게 하나만 잡아줘요. 금요일까지 발표라.”
"그냥 가볍게 시안 하나만 내일까지 빠르게 가능하죠?"
내일까지 뭘 하라고요?
디자이너 동지들은 이 말들이 익숙할 겁니다.
왜 인스턴트처럼 빠르게 나올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지
디자인을 업으로 삼은지 오래된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습니다.
물론 이미지 자체는 야근을 하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브랜드는 야근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브랜딩이 그렇게 뚝딱 되는 거였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시간을 들였겠습니까.
브랜드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거 로고 좀 바꾸는 거 아니에요?”, "촬영 좀 돈 들인 티 나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일수록, 막상 기획안 발표 자리에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이렇게 생겼는지, 왜 이 컬러인지, 왜 이 컨셉으로 촬영해야하는지
왜 이 문장이 브랜드를 대표하는 건지 설명해 주세요.”
설명을 요구한다는 건 결국, 감각이 아니라 논리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로고와 컬러가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로고와 컬러만 가져다주면, 그제야 논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게 브랜드랑 어떤 관련이 있어요?”
논리가 필요한 디자인을 요청한 듯 당당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논리는 뚝딱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논리로 구성된 브랜드는 더더욱 하루이틀 만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제 "내일까지 되죠"라고 요청하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까지 로고를 요청하든, 기획안을 요청하든,
디자이너가 힘든 건 야근 때문이 아닙니다.
논리 없이 감각만 요구했다가, 결과물 앞에선 논리를 따지는 그 구조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반복됩니다.
늘, 아주 그럴듯한 말로.
“그냥 디자이너 감각으로, 느낌 빡 오게 해줘요.”
실무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자, 제일 위함한 요청입니다.
왜냐하면…
방향 없이 뽑는 시안은 결국 아무 말도 담지 못한 디자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브랜드는, 브랜딩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금방 버려지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애초에 기획 없이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급한 거 하나만’이 누적되면, 디자인팀은 항상 방화 진화팀이 됩니다.
기획이 아닌 ‘진화’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합니다.
브랜딩을 한다며 디자인부터 시작합니다.
무드보드를 먼저 만들고, 로고를 고르고, 색을 칠합니다.
방향은 나중이고, 정리는 그때 가서 보자 합니다.
정해진 것도 없이 출발한 브랜드가 어디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요.
그래서 자꾸 되돌아오고, 그래서 매번 다시 만들고,
그래서 브랜드가 아니라, 시안만 쌓여갑니다.
그럴 때, 디자이너가 조심스럽게라도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결과물이, 앞으로 브랜드의 기준이 되어도 괜찮으신가요?”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내일까지 만들 것’에서 ‘무엇을 왜 만드는지’로 주제가 전환되며
디자이너와 요청자가 다시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대다수 상황에선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상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디자이너는 드뭅니다.
현실에서 디자이너는,
회사라는 구조 안에서, 클라이언트라는 위계 속에서
늘 ‘을’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선 촛불을 들 용기보다
마우스를 더 빨리 움직이는 것이 실용적입니다.
그리고 그리 급한 일은, 촛불 든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설득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경우는 더더욱 드뭅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빼앗기고, 야근 시간은 늘어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입술을 살짝 비죽이는 정도의 반항으로 그치고 맙니다.
이 글을 읽는 기획자 중,
“내일까지 디자인 나올 수 있죠?”
“기획안은 이따 오후에 드릴게요. 힘 안들이고 드래프트하게 내일 오전까지 주세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본 적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브랜드 마케터, 브랜드 기획자,
혹은 브랜딩을 업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면—
죄송하지만, 당신은 브랜딩을 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디자이너의 푸념이 아닙니다.
브랜딩을 가볍게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브랜드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지켜본 사람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