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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세화 Nov 17. 2019

인생이 자꾸 꼬인다면

인내가 최고의 미덕은 아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서는 멀리 갈 수 없다 – 최정상 <도전을 위한 명언> 

1.     

지독한 패배의 쓴맛을 맛본 후 멋지게 재기해 보란 듯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를 거듭하며 스타일을 구기는 사람도 있다. 내가 후자의 경우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잡지사에서 해고 당한 얘기를 하면서, 커리어의 첫 단추를 잘못 꿴 아픈 기억을 주구장창 털어놓은 바 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적성에 맞지 않는 대기업 광고대행사에서의 2년. 첫 직장에서 굴욕과 아픔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며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운 좋게 기회를 얹어 기자로 전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생활 역시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메이저 신문사에 들어갈 기회를 허탈하게 날려 버리고, 실수로 눌러 앉게 된 것 같은 타블로이드지 창간멤버로 일하면서 기자에 대해 품어 왔던 환상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는 야근과 주말근무로 인한 피로의 누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상사,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업무,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로 인해 불만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번엔 내게 맞지 않는 신발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뚜벅뚜벅 걸었다. 감정이 메마른 업무, 이악스럽고 경쟁적인 동료들, 무례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으며 배려심 없는 조직문화, 얄팍한 지식과 글쓰기, 만성적인 과로와 마감 스트레스를 기자가 되려면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과정이라며 스스로 불만을 잠재웠다. 어쨌든 기자라는 일이 좋았고, 참고 기다리다 보면 머지 않아 다시 마음에 드는 메이저 언론사로 옮길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는 사이, 하루가 멀다 않고 헤드헌터들로부터 국내외 최고 기업의 마케터나 홍보 담당자 자리를 제안하는 전화를 받았다. 


‘조금만 더 견디자. 기자로 성공할 거야. 다시 회사원으로는 안 갈 거야. 한 우물을 파야 해. 나한테 맞는 직업은 기자지, 회사원이 아니야. 이번에도 직종을 바꾸면 아무 것도 안돼.’ 


그런데 참고 기다린다고, 고만고만한 환경에 변화가 있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솔직히 구관이 명관이라고,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사의 갑질, 여직원들의 뒷담화, 치사하고 유치한 동료들, 경쟁, 폭력적이고 부당한 조직문화.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 때문에 극심한 갈등을 겪다가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고, 내 청춘은 찌들어갔다. 고생 끝에 어처구니 없이 입사기회를 놓쳤던 메이저 언론사 주간지에 5년 만에 T.O.가 생겨 입사했으나, 자리가 만족스럽지도, 함께 일하는 상사나 동료와의 갈등도 여전했다. 


“나는 백조, 그들은 거위”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들을 그렇게 느끼는 건 나의 주관일 뿐

이고, 그들은 다 나름대로의 이유와 입장이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직장에서 나를 괴롭혔던 혹은 잘 지내기 힘들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보다 더 많은 친구

와 든든한 자기 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 불협화음이 계속된다면,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거나, 왠지 불편하고 만족스러운 환경이 아니라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인내가 항상 최선은 아니다. 참고 견딜만한 가치가 없는데도 꾸역꾸역 버티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내가 미덕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힘들면서도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고 합리화해버리곤 한다. 인내심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내할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 먼저 분별력을 가져야만 한다. 둘째, 속도사회가 우리를 앞만 보고 달리도록 내몬다. 방향이 잘못된 것 같으면, 가던 길을 멈춰 서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남들보다 뒤쳐질 까봐 그냥 꾸역꾸역 달린다. 셋째, 그냥 관성의 법칙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가진 걸 놓기 싫어하는. 넷째, 나의 기준이 아닌, 타인이 정한 기준에 맞춰 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책만 보면 머리에 쥐가 나는, 공부가 체질이 아닌 학생들도, 모두 다 대학에 가려고 기를 쓰는 현실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기자생활의 고충을 잘못 꿴 첫 단추와 발에 안 맞는 신발에 비유했는데, 10년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스카우트제안들을 물리치고, 계속 기자로 일했다. 그러다 억울하게 잘렸고. 몇 년 전부터 왜 그 좋은 자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지, 땅을 치고 후회도 많이 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제안 받았던 자리들도 내게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조직생활도, 기자도 모두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사업도 마찬가지. 더군다나 사업실패 후 원치 않는 잡지사와 소규모 회사에 입사와 퇴사를 수없이 반복하는 참상이 벌어졌고, 인생의 막장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직장생활(그냥 일반 회사에 한정된 건지는 모르겠다)이 맞지 않고, 작게는 언론사 생태계, 그 중에서도 규모가 작고 열악한 잡지사, 마이너 매체, 소규모 회사, 그리고 창업자가 처한 상황과 주변 사람들 전반과 맞지 않았다. 가령,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채고, 책임을 떠넘기거나 자신의 실력이나 노력을 부풀려 떠벌리며 승진하고, 힘 있는 사람한테 아부하고, 약자는 무시하고, 자질 없는 리더. ‘야근 캠페인’이라 불리는 보여주기 식 야근, 뒤에선 회사 욕하면서 앞에선 충성하는 척 연기하는 포커페이스, 살얼음 같은 상황에서도 절대 안 나가고 버티는 노련함과 처세술, 사내정치. 정도의 차이일 뿐, 어디나 비슷하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사실 비난하면서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직장생활을 하고 

나이를 먹어도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조차 구차해지는 구멍가게 만한 조직특유의 문화와 각종 문제점도 마찬가지. 작은 조직일수록 살아남기 위해 더 살벌하게 사내정치를 하고, 사장은 더욱더 직원에게 굴종의 관계를 강요하고, 서로가 서로를 졸로 보며 하대하기 일쑤다. 일에 체계가 없고,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직원들에, 자기집 안방인지 회사인지 구분 못하는 직원 또한 적지 않고, 까마득히 어린 ‘젊은 꼰대’들의 갑질이 도를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건, 물위에 둥둥 떠 다니는 기름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며, 맨발로 자갈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몹시 괴로운 일이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닌데’하는 불만스러운 하루하루가 쌓인 결과,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알코올 의존증, 공황장애와 함께 뇌피로 증후군을 앓게 됐다. 암도, 당뇨병도, 관절염도 아닌,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 따위가 무슨 병이냐며 핀잔을 주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날이 기억난다. 며칠 째 피로감과 멍하고 의욕이 없었는데, 어느 날 머리가 불에 타 들어 가는 듯이 아프고, 계속 눈물이 났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절망감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처음엔 사업하면서, 또 구직활동을 하며 너무 많은 일을 혼자서 처리해왔고, 생각이 과다해 생긴 일시적인 피로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증상은 몇 년째 호전될 기미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28세의 빌 게이츠가 NBC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운영하면서 일주일에 90시간 이상 일하고, 4일은 회사에서 잠을 잤다는 그는 “번아웃 증후군을 걱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환하게 웃으며 “저는 번아웃 증후군을 걱정하지 않아요.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거든요.”라고 말했다. 


심신이 모두 탈진 상태에 이르는 번아웃 증후군은 업무 과다로 인해 생기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 그리고 관계의 스트레스로 인해 에너지를 소진해버리기 때문에 걸리는 것이다. 번아웃 증후군의 또 다른 이름은 ‘싫어 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burn-out)을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증후군”으로 정의하고 있다. 


항상 몸살 기운이 느껴지면서 기운이 없고, 만성 두통과 불안, 우울증에 시달린다. 집중이 안 되고, 무기력하며, 식욕이 없고, 만사가 귀찮고 짜증스럽다. 몸이 잘 붓고, 체중관리도 안 된다. 의학 프로그램을 보니, 이와 같은 상태가 심하면 암과 심혈관계 질환, 대사질환에 걸릴 확률이 대단히 높다고 한다. 


2.     

“지금 다니는 회사, 그냥 때려 치울까요?”


가끔 퇴사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백이면 백 ‘제발 저 좀 말려주세요.’하는 심정에서다. 그건 내가 경험을 많이 해봐서 잘 안다. 세상에 자기 밥그릇 귀한 줄 모르는 직장인 없고, 버티기 힘든 상황이니 그만둘 생각을 다 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당장 옮길만한 직장을 찾기 쉽지 않고, 무작정 나오자니 먹고 살 걱정이 태산이거나, 현재 직장에 불만은 많지만 그만두자니 아쉬운 점이 있을 때, 제3자에게 그만두지 못하게 말려달라고 애원하는 셈이다. 이렇게 진퇴양난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직장인에게 나는 담대해지라고 조언한다. 옮길 곳을 찾고 사표를 내는 게 최선이지만, 여의치 않을 땐 너무 오래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 말라고 말이다. 세상엔 행운을 끌어들이는 기운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 주눅들고,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선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물론 힘들 때마다 새로운 환경을 찾는 게 낫겠다며 사표를 낼 순 없다. 공부도 그렇고, 관계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반드시 불만이 생기게 마련이고, 슬럼프도 있고, 고비도 맞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참고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회사 선배 하나가 업무 관계로 만나 알고 지내던 파트너와 함께 콘텐츠 기획사를 창업했다. 둘 다 열정과 능력을 겸비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었고, 단기간에 괜찮은 프로젝트 다수를 수주해 성과를 내며 쑥쑥 성장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상당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회사이기 때문에 너무 구체적으로 얘기 하진 않겠다.) 회사 선배(이하 A)는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면서 점진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고, 파트너(이하 B)는 돈을 적게 벌더라도 처음부터 하고자 하는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업은 두 CEO가 같았다.          


이럴 때 정답은 없다. 각자의 가치관과 개인이 처한 상황, 능력과 자질 그리고 운, 시장 등에 따라 선택할 문제다. A는 돈이 되는 각종 허드레 일들을 계속 수주해왔고, 회사가 성장할수록 B의 불만은 커져갔다. 그러다 B가 과로로 쓰러져 수개월 간 병가를 떠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생각해보면, B가 병이 났던 건, 업무 과다라기 보다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A는 기약 없이 병가를 떠난 B의 몫까지 떠맡아 혼자서 회사를 꾸려나갔다. B에게 꼬박꼬박 급여의 80%도 지급했다. 하지만 B는 이를 고마워하기는커녕 A에게 회사 운영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혼자 하는 사업은 성장하기 어렵다는 신념을 갖고 있고, B와 일하면서 시너지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A는 B에게 계속 함께 가자고 설득한다. 불협화음 속에서 외형적인 성장은 거듭됐고, 하고자 하는 사업도 틈틈이 병행해 소기의 성과를 거둬냈다. 제3자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결국 A와 B 모두 상처를 입고 갈라섰다. 부모가 시켜도,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사업파트너 때문에 10년 가까이 비자발적으로 일을 해야 했으니, B가 느꼈을 억울함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A는 어떨까? 동업의 이점을 고려해 그가 감내해야 했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상대방 때문에 언짢은 일이 있어도 참았고,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데 많은 기여를 했지만 상대방의 원성을 감수해야 했다. A와 결별한 B는 독자적으로 하고자 했던 사업을 시작해 언론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양쪽의 입장 모두 일리가 있고,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다만, 뜻이 맞지 않았던 두 동업자의 결말은 갈등이 있을 때 무조건 참고 기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노트: 

✔성공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행복이 쌓이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현재 상황이 불만스럽다면 성공할 확률은 그만큼 낮아진다.  

✔한번 꼬인 인생은 계속 꼬인다. 실패를 거듭할 땐 멈춰 서서 잘못된 방향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불행이 반복된다면, 불행의 근본 원인, 즉 메커니즘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참고 견디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는 속설을 맹신하지 말자. 인내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불만스러운 하루하루가 쌓여 참담한 불행을 야기하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일은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이 된다. 번아웃 증후군의 다른 말은 ‘싫어 증후군’이다.  

✔발에 맞는 신발인지 아닌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르지 말자.

✔이제까지 쌓아온 노력이 아까워서, 혹은 변화가 두려워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행군을 계속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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