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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립 Apr 07. 2021

청춘이란 찬란한 슬픔

청춘의 이름에 속은 수많은 청춘은 어디로 갔나


“당신은 청춘입니다!”
“꽃 다운 청춘을 마음껏 즐기세요!”
“청춘의 나이에 못 할 게 뭐가 있어?”

출처 Unsplash @ian-taylor



'청춘'이란 용어들로 젊은 층에게 푸른빛의 마케팅을 한다. '너희는 아직 젊으니까 마음껏 몸으로 부딪혀서 성과를 얻어내라. 고생은 젊어서 해야 늙어서 고생하지 않는다.' 라며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가 '청춘'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20대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사회생활에 찌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도전해도 된다는 것은 실로 어마 무시한 도박이다.

'도전'의 결과는 성공과 실패로 나뉜다. 그리고 그 실패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실패와 그렇지 않은 실패로 나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도전을 할 때 이 실패가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예상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도전은 겁이 나는 것이다. 한 번의 추락이 영영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지하의 지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얘기한다. 실패도 경험이라고. 실패가 성공의 양분이 되는 건 맞지만, 그것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실패일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하세요.'라는 말은 '실패의 데드라인을 어떻게 정하세요.'라는 말보다 흔하다.


종종 공무원 수험생 시장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시험에 도전을 하려거든 기준을 정해놓고 시작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간은 최대 X년, 비용은 최대 얼마…. 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정해놓지 않으면, “아,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시험 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자꾸 임의적으로 실패의 커트라인을 늘린다. 내가 정한 커트라인이 실제 내 커트라인보다 더 바깥으로 나간다면, 아마 돌아오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수년이 걸리는 동안 청춘이란 찬란한 이름은 낡아져만 간다. 그렇게 나는 사회가 말하는 청춘의 정의에서 배제되고 만다. 내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말이다.


출처 Unsplash @krystian-tambur



아마 그들이 말하는 청춘은 '실패해도 괜찮은, 무한대로 도전해도 타격받지 않는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 같다.

어떤 하나의 불법 대부업체 같다. 우리에게 청춘이란 이름을 빌려주는 대신에 우리의 젊음과 열정을 모두 다 가져간다. 이름을 빌린 결과는 너무나도 혹독하다. 이름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웠던 거라면 빌리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청춘을 너무나도 푸르게 얘기하고 있었기에 호기심에 빌려버렸다. 청춘이란 이름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걸, 모든 걸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청춘은 그렇게 점점 바래져 가지만
아직도 청춘이 그렇게 푸르러 보이는 이유는
빼앗긴 것들에 아파하며 흐른 눈물이 푸른 강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강물이 반짝거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눈물은 하염없이 반짝거린다.
그렇게 또 다른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반짝임에 홀려 그 강으로 뛰어들고 말겠지.
그렇게 강물은 끝도 없이 불어나 바다를 만들겠지.
청춘은 청춘의 바다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채 빛을 잃고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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