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 Nov 06. 2023

떨리고 기쁜 첫 순간

3부 EP09. 공방의 첫 손님

   그림 모임이 아닌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공방 예약을 했다. 정식 첫 손님인 것이다.


   오후 2시, 여자 두 분이 공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앳된 모습으로 보아 20대 초, 중반 같았다. 예약 신청을 한 여자분은 성산에 살고 있는데, 친구가 마침 놀러 와서 같이 오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준비해 놓은 앞치마와 팔토시를 안내하고,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클래스를 진행했다. 작품 제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준비한 연습장에 기초적인 연습을 먼저 진행했다. 얇은 선 긋기, 굵은 선 긋기, 면 색칠하기, 두 가지 이상의 색으로 그러데이션 넣기, 덧칠하기를 순서대로 하면서 우리 셋은 이것저것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제주에 오게 되었는지, 제주에서 무얼 했는지, 어디가 좋았는지 등의 경험을 서로 공유하다 보니 나이 어린 손님들이 꽤 친근하게 느껴졌다. 

   연습이 끝나고 이제 작품을 제작할 시간이 되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사진을 보고 그리거나 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예시작품을 보고 그릴 수 있다고 설명하자, 두 사람은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가져왔다고 했다. 한 명은 구름이 많은 하늘 아래 오밀조밀하게 피어 있는 빨간 꽃밭을, 다른 한 명은 알록달록 무지갯빛의 뭉게구름을 그리고 싶다고 보여 주었다. 나는 종이 테두리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다음부터는 그림 그리는 순서와 방법을 각자 알려 주었다. 두 명이 각자 다른 것을 그리는 것을 계속 지켜보며 중간중간 짚어줘야 할 곳을 짚어주고, 어려워하는 부분을 도와주다 보니 1시간 반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핸드폰 속의 그림과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개성을 살린 그림 두 점이 완성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며 뿌듯해했다. 오일파스텔 그림은 손에 묻기 때문에 내가 제공한 비닐에 담거나, 집에 가서 액자에 담아 보관하라고 설명한 후 뒷정리를 했다. 리뷰로 후기를 부탁드렸더니 밝게 웃으면서 써 주고 갔다. 굉장히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고 생각하며 미루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정돈했다.


   나름 긴장되던 첫 손님 이후로, 손님들은 간간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커플이나 친구보다는 주로 1인이 혼자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뭔가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신기했다. 손님들 대부분이 실제로 조용조용하고 먼저 말을 하기보다는 내가 말을 걸어주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는 성격이었다. 다들 그림 실력과는 무관하게 꼼꼼하고 섬세한 손길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다행히도 완성된 작품에 실망하는 경우는 없었고, 기뻐하면서 사진을 찍고는 소중하게 들고 갔다. 의외로 뿌듯한 작업이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매일 출근해서 디자인 외주 작업을 했다. 가만히 앉아서 마우스와 키보드만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 보니 손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눈병까지 나서 빨갛게 충혈되고 따가워서 작업을 오래 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안과를 다니면서 계속 밀린 작업을 해야만 했다. 엄마가 계셔서 삼시세끼 밥걱정은 안 하고 지냈지만 극심한 우울증이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우울증 약 먹는 것을 너무 싫어하셔서 이틀에 한 번만 먹으라고 부탁을 하셨다. 나는 엄마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할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 이틀에 한 번씩만 약을 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자 약의 부작용이 극명하게 느껴졌다. 약을 먹은 다음날은 하루종일 무기력하고 비정상적으로 졸린 것이었다. 약을 먹지 않고 잔 다음날은 비정상적으로 졸리지까진 않았다. 평소에 졸리고 무기력한 것이 약 때문인 것이 확실해지자 약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주 의사 선생님이 주신 소견서를 가지고 제주 정신과를 찾아서 가야 하는데 내키지가 않는다. 정신과를 바꿔서 또다시 새로운 의사 선생님을 마주하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말해야 한다는 일이 너무 두렵다.



이전 08화 끝없는 불안과 초조의 늪 속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