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EP19. 악몽의 연속
디자인 작업을 하던 중 어떤 업체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본래 육지에서 활동하던 업체인데, 제주에 신상 브랜드를 내려고 한다며 나에게 로고 및 패키징, 홍보물 등을 전면적으로 맡기고 싶다는 것이다. 디자인 초보인 나에게 이렇게 큰 일을 맡겨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믿고 맡겨주었으니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로고 제작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첫 번째 미팅에서 대표는 내가 제작한 로고를 마음에 들어 했고, 이것저것 본인이 원하는 레퍼런스를 설명하며 디자인을 보완해 갔다.
미팅을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한번 진행되었는데, 대표는 외국에서 미술을 배우고 왔다며 색감이나 모양에 대해 여간 깐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가 앞으로의 간판 디자인과 홍보 포스터, 캐릭터, 제품 패키징 등 모든 것을 맡아줘야 한다며 압박을 주었다. 그 미팅 이후부터 나는 슬슬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초짜인 내게 너무 버거운 기대 같았고, 경험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금액도 터무니없이 낮게 제시해 버린 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 후로 4일 연속으로 악몽에 시달렸다.
로고를 만들면서 머리를 쥐어짜는 꿈과, 퇴직 전 직장에서 나를 괴롭혔던 나이 지긋한 여자 동료가 나와서 또다시 나를 괴롭히는 꿈을 꾸고는 새벽에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수능 기간이 되어 영어 공부를 다시 하는데 가뜩이나 영어를 못 해서 문제집을 봐도 너무 어려워서 쩔쩔매는 꿈을 꾸고, 불안할 때마다 등장하는 해일과, 그 해일에 온몸이 덮쳐지는 꿈 또한 빼먹지 않고 꾸었다. 또 하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인 <신사의 품격>이 꿈에 나왔는데, 결말이 달라져 있었다. 주인공 김하늘이 원래 짝사랑했던 김수로와는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장동건과 이루어지면서 드라마가 끝나는데, 꿈에서는 이제까지 짝사랑했던 김수로와 이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내가 내심 원했던 스토리기도 해서 이 꿈은 그나마 안정감이 느껴졌다. 불안한 나머지 드라마 속으로 도망치려는 것일까, 헛웃음이 나왔다. 그 외에는 모조리 악몽에다가, 잠에서 깨면 꿈에서 깨어 나오기가 너무 힘들 정도로 몰입을 하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나 미팅일이 되었다. 보통 저녁 7시쯤 미팅을 해왔기 때문에 미리 점심쯤에 언제 올 것인지 연락을 먼저 했다. 편하게 일을 보고 있으라는 답장이 왔다. 몇 시까지 오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동안 해야 할 일들과 공방 작업을 했다. 정해졌던 약속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8시가 되었다. 나는 이번에는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전화를 받은 대표는 다른 업체와 식사 중이라며 마치는 대로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또 한참을 기다려도 오네 마네, 전혀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바람맞았음을 깨닫고 화가 나서 퇴근을 했다. 연락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다른 업체와 미팅 중? 그러면 난 뭐란 말인가. 나도 중요한 로고 및 브랜딩을 맡은 업체인데. 이 자는 사람 간의 예의가 전혀 정립되지 않은 사람 같았다. 마치 본인이 원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쓰는 물건 대하듯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였다.
다음 날 나는 대표가 아닌 실장이라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대표와는 더 이상 연락을 원하지 않으며, 계약을 종료하겠다고 통보했다. 실장은 쩔쩔매며 원래 대표가 연락이 잘 안 되기도 한다며, 대표가 많이 바쁘다는 둥 핑계를 댔으나,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제작했던 로고에 대한 금액을 제한 나머지를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고 연락을 끊었다. 후에 이 이야기를 들은 강과 B는 매우 아쉬워하며 이미 선입금된 금액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몇십만 원 정도에 마음이 불편하고 싶지 않고, 더 이상 저 예의 없는 사람들과 엮이기 싫다고 단칼에 대답했다. 디자인도 그렇지만,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모든 거래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찌 보면 나라는 신규 디자이너를 얕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도 상관없는, 돈이 급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디자이너. 그러나 그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업무가 절실하고 돈이 필요해도,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사업가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를 저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예상컨대, 이렇게 아랫사람 대하는 사람치고 그다지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계약을 끊어내고 나자 악몽은 줄어들었다. 자잘한 의뢰가 들어오는 것을 받아서 하고, 내 작업물이 마음에 드는 곳과는 계속 업무를 받아서 하기도 했다. 일러스트 명함 제작, 제품 촬영 및 상세페이지 제작, 인스타그램 피드 제작, 메뉴판 및 메뉴 일러스트 제작 등. 한 달 넘게 디자인 외주를 받아서 하다 보니 깨닫게 되었다. 디자인 역시 서비스직이라는 것을. 고객이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을 해 줘야 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견뎌야 하고, 마음에 쏙 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함을 느끼고. 사람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내가 그만둔 회사와 거진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찌 보면 더 힘든 점도 있었다. 회사는 그나마 퇴근시간과 주말이라도 있었는데, 이건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주말에도, 새벽에도 의뢰 알람이 울리면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확인하고 곧바로 상담을 거쳐 작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덕분에 작업이 매우 빠르다는 리뷰도 얻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이 몰릴 때는 한꺼번에 두세 개씩 일이 오다가, 또 어떤 때는 며칠 동안 한 건의 일도 오지 않았다. 들쭉날쭉한 업무량 때문에 지치고 불안했다. 그래도 고객과 직접 대면할 일은 없으니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매일 아침 노트북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