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태민이는 요새 케첩과 사랑에 빠졌다. 우리 부부가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먹는걸 유심히 보던 그는, 손가락 끝에 슬쩍 묻혀서 맛을 보는 단계를 거쳐 이제는 밥에 케첩을 듬뿍 넣고 비벼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며칠 전 어느 날, 밥에 야채볶음과 케첩을 얹어 섞어주니 열심히 먹다가 한 마디를 던진다. "케첩, 더 줘"
아들놈이 아비를 부려먹다니? 순간 괘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아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요청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냉장고에 가서 케첩통을 들고 오는 와중, 뚜껑이 덜 닫혀 있었는지 케첩 한 뭉텅이가 바닥의 카펫에 쏟아지고 말았다. 그 순간 터진 태민이의 한마디.
몇 년간 해온 다양한 자폐 관련 테라피 (speech, OT, Music, 승마...)와 최근 열심히 하고 있는 마사지 중심의 몸놀이로 인해 태민이의 민감함과 주의 산만은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폐아동 특유의 타고난 기질은 어디 가지 않기에 일상에서 아이의 행동을 컨트롤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그럴 때 나나 와이프가 가장 먼저 쓰는 방법은 "야!" 혹은 "김태민!"하고 소리를 질러 아이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살다 보니 체벌을 통한 훈육은 가급적 피할 수밖에 없고 (물론 미국 부모들도 남들 없을 때는 다 두들겨 팬다더라...), 자연스레 언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아이를 혼내게 된다. 물을 엎질렀을 때, 건널목에서 손을 놓으려 할 때, 공부하다가 장난칠 때 등등등.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어느샌가 '잘못을 하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라는 이상한 논리구조가 아이 머릿속에 생겼나 보다. 아니, 어쩌면 한 번쯤 아빠에게 갚아줄 기회 (?)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아무튼 케첩을 닦아내며 다시 한번 '아이 앞에서는 뭐든 조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조언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을 아이가 지켜보고 있고 언젠가 따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