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야구부 이야기
2011년 한국은행에 입행하자마자 바로 야구부에 가입했다. 어떤 동기는 '사무실에서 보는데 주말에 또 보고 싶냐?'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만, 석유공사 야구부 사람들과의 만남이 워낙 즐거웠기에 새 직장에서의 야구부 가입에는 한 점의 고민도 없었다.
한국은행 야구부가 소속된 리그의 이름은 '금융단 리그'로 남양주 소재의 '우리은행 야구장'을 사용했다. 경기장을 처음 본 느낌은 "와 진짜 넓다!!" 중앙 담장까지 124m, 좌우측 105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 (국내 프로야구장 중 가장 큰 잠실구장이 중앙 125m, 좌우측 100m이다)는 투수에게는 안도감을, 타자에게는 막막함을 선사했다. 외야 잔디를 자주 깎지 않아 여름이면 공이 잘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풀이 억세게 자라긴 했지만 내야 그라운드 상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안함) 한국은행 야구부에서는 2년 차 중 한 명이 총무/감독을 맡는 관행이 있었다. '전직 총무는 무조건 선발 라인업'이라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로 총무의 업무는 고된데, 야구 장비 운반 + 신입 카풀 + 라인업 관리 등 온갖 업무를 다 떠맡기 때문이다. 2011년 연말 모임에서 다들 적극적으로 필자를 총무로 추대 (?)했는데, 2012년 결혼 예정인데다 차도 없었기에 엄두가 안나 계속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강권과 거절에 참석자들 모두 당황해서 분위기가 굉장히 싸해졌던 기억이 난다.
결국 보다 못한 동기 S가 총무를 맡겠다고 자청했고, 필자 대신 2012년에 온갖 고생을 해야 했기에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결혼 전에는 '결혼 이후 야구 못하겠지' 싶었지만 생각보다 와이프는 자비로웠고, 차도 주말에만 빌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으면 될 일이었다. 각이 안 나오면 쉽게 OK하지 못하는 게 필자의 천성이긴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가 대신 짐을 질 이유가 되지는 못하니까...
(마당쇠) 석유공사 야구부에서는 워낙 경험 많은 선배들이 많아 따라가는 입장이었지만, 한국은행 야구부에서는 지역 사무소 근무, 유학, 해외사무소 발령 등으로 인해 꾸준히 출석하는 선배들이 많이 없었기에 좋든 싫든 어느 정도 후배들을 리드해야 했다. 먼저 나서서 낡은 팀 배트들을 교체했고, 경기 중 조언과 후기 작성 등을 통해 신입 부원들이 야구 규칙과 노하우를 배워 팀에 적응할 수 있게 도우려 했다. USAGY Eagles (한미 연합 야구팀)에 가입한 2014년부터는 한국은행과 이글스와의 경기도 가능한 자주 주선했는데, 이는 리그 경기에선 많이 뛸 수 없는 비주전 선수들에게 경기 경험을 쌓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Eagles 전용 구장에선 대부분 9이닝 경기를 했으며, 친선경기이기에 라인업 숫자 제한 없이 참석자 모두가 출전할 수 있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리그 이전이다. 금융단 리그 야구장은 시설 자체는 괜찮았지만 대중교통으로 오기 불편하여 차가 없는 신입들이 오기 어려웠고,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명 두 명 발걸음을 끊곤 했다. 하지만 야구부가 워낙 금융단 리그에서 오래 뛰기도 했고, 회사의 야구부 지원 명목이 '타 금융기관과의 친선 및 우의 도모'였기에 리그를 바꿀 경우 급여후생팀에서 지원을 줄이거나 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기에 리그 변경은 늘 공상으로 그치곤 했다. 다행히 친한 후배 G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다른 리그 탐색, 급여후생팀과의 협의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2016년부터 서울 시내 경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한 리그'에서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6년부터 신입들의 출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얘들을 어떻게 경기에 다 투입하지'가 총무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된 건 덤이다.
(아쉬움) 한국은행 야구부에서는 유달리 멤버 교체가 자주 일어났다. 신입들을 가르쳐 간신히 전력으로 만들어 놓으면 출산, 결혼, 지역 사무소 전출 등의 이유로 하나둘씩 사라져 갔고, 이러니 경기에서 손발이 맞기란 어려웠다. 계산 가능한 투수도 두어 명에 불과해서 그들이 빠지면 경기를 풀어나가기 쉽지 않았고, 자주 바뀌는 선수와 포지션으로 인해 빈발하는 에러는 잘 던지던 투수의 어깨도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2016년은 달랐다. 대학 시절부터 야구로 잔뼈가 굵은 K와 J가 공동으로 총무를 맡아 신입들을 잘 이끌었고, 규정타석을 채운 멤버가 자그마치 6명이나 될 정도로 고정 멤버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계산이 되는 투수가 4명이나 등장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이에 6승 4패 1무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비록 상을 당해 플레이오프 경기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리그 최강팀을 상대로 끝까지 분전했다는 소식은 상중에도 필자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아쉽다. 그래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뭐, 그때만 해도 내 인생 2막이 미국에서 열릴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2017년 5월, 출국 전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메이저리그 다녀올게요!"라는 말에 다들 유쾌하게 웃었고, 친한 후배들에게는 "나 없는 동안 야구부 잘 부탁한다"라고 나름 비장한 말을 남겼다. 2019년 초에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가진 술자리를 파할 때조차 "두 달 있다 보자"며 가볍게 헤어졌는데 그게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다들 건강하길, 그리고 즐겁게 야구를 즐기고 있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