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aseball? 한국 고유의 야구 문화
용병 傭兵
1. 군사 지원한 사람에게 봉급을 주어 병력에 복무하게 함. 또는 그렇게 고용한 병사.
미국에서 야구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다. 모래로 덮여서 울퉁불퉁하고 사이즈도 작은 한국의 학교 운동장과는 달리, 미국의 어지간한 야구장들은 대부분 잘 관리되어 있고 운동장 크기도 커서 제대로 된 야구를 하는 기분을 준다. 동네 공원이나 중고등학교만 해도 괜찮은 야구장이 많아 멀리까지 운전해 갈 필요가 별로 없고, 수준 높은 선수들이 많아 치열하게 운동할 수 있는 것도 (이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 대부분 한국 리그보다는 월등히 잘하니까...) 장점 중 하나다.
다만 늘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리그가 주말에만 경기를 잡는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씩 운 좋은 경우 평일 저녁 경기를 배정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야구는 주말에 한다. '이게 뭐가 문제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자영업을 하는 사람의 경우 주말에 시간을 빼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필자같이 주중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야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주말에만 야구가 가능하다는 것은 늘 아쉬운 부분이다. 이럴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름이자 한국이 그리운 이유, 바로 '용병 야구'.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밤늦게 돌아다녀도 안전할 정도의 치안, 그리고 24시간 영업하는 배달 음식 등에 놀란다고 하는데, 아마 외국인 야구 경험자들은 용병 경기의 존재를 알게 되면 이에 못지않게 놀랄 것 같다. 한국에서는 문자 그대로 365일 내내 (비만 안 오면) 원하는 시간에 야구를 할 수 있으며, 이는 절대적으로 '용병 야구'라 불리는 한국 고유의 야구 시스템 덕분이다.
외국인 야구 용병을 써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리그 경기에서 팀원이 모자랄 경우 몰수 게임을 피하기 위해 구해온 외부 인력을 '용병'이라고 불렀고 대부분 친구 혹은 지인이었다. 불려 온 용병들은 초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게임비를 내거나 음료수 혹은 간식을 사 오곤 했다. 사실 용병은 돈을 위해 고용된 사람이기에 '용병'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다른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내기 어려우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실제로 거의 고유명사화되기도 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사회인 야구의 인기가 많아지면서,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모은 후 게임비를 갹출하여 야구 경기를 진행하는 사업자들이 많이 늘어났고 이런 스타일의 야구 경기를 '용병 야구' 혹은 '용병 경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생각보다 용병 경기의 수요도 많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기에 주로 경기도권에 수많은 용병 야구장들이 생겨 났으며 (아무래도 서울은 비싸다 보니...), 이런 운동장들은 인조잔디, 조명, 경기 녹화 장비, 더그아웃 및 에어컨/난로 등 우수한 시설을 갖추고 야구인들을 유혹한다.
용병 야구의 장점은 다양한데, 크게 Cost, Flexibility, Competition, Fun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Cost: 사회인 야구팀에 가입하면 리그비로 보통 1년에 30만 원 정도를 내는데, 보통 서울 경기권의 리그가 8~12경기를 배정하는 것을 고려하면 게임당 3만 원 수준이다. 반면 용병 야구는 평일은 1~1.5만 원, 주말은 1.5~2.5만 원 수준으로 리그 경기보다 저렴하며, 게다가 교체 걱정 없이 풀타임으로 뛸 수 있다.
- Flexibility: 365일 언제든 본인 시간만 맞으면 OK. 한국인들이 얼마나 바쁜가? 결혼, 장례식, 돌잔치, 집안 행사... 게임하자마자 정장으로 갈아입고 각종 행사장으로 뛰어갈 각오가 된 필자 같은 중증 야구 환자가 아니고서야 리그 모든 경기에 참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돈은 다 내놓고 시간 안 맞아서 게임을 못 가면 얼마나 아쉬운지... 하지만 용병 경기는 본인 시간이 될 경우에만 참석하면 그만이다. 그게 평일이든 주말이든, 오전이든 오후든 밤이든 선택지는 널려 있다.
- Competition: 용병 야구의 참석자들은 자기 돈을 내고 별도의 게임을 찾아서 할 정도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인 리그 경기보다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지역마다 요일마다 편차는 있지만 필자 경험상 대부분의 용병 경기 참석자들은 어지간한 팀의 중상위권 수준의 실력자였다. 가끔씩 선출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운동했던 사람들)들이 투수로 던지거나 단체로 참석하거나 하는 날이면 게임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게 됨은 물론이다.
- Fun: 용병 야구에 와서 승리에 목을 매는 사람은 없다. 이 부분이 리그 경기와는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그렇기에 다들 부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실험해 본다. 리그 게임에서 외야만 보는 사람이 내야수에 지원한다던가, 팀에서 투수/포수를 안 시켜줘서 용병 야구에서 연습하거나... 필자의 경우 '지명타자 + 야수' 식으로 두 포지션에 지원해서 (게임비도 두배로 내고) 한 경기에 6~12번씩 타석에 들어가곤 했다 (리그 경기는 보통 3~5 타석이다). 라인업에 두 번 들어가다 보니 타선이 정말 빨리 그리고 많이 돌아오며, 이 때문에 홈으로 뛰어들어온 뒤 헉헉대며 바로 배트를 집어 들고 타석으로 가거나, 우타자인 필자가 좌타석에서 타격을 하는 등 리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예능이 펼쳐지게 된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익숙하고 친한 팀원이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 운동하는 게 그리 편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처음에는 친구나 팀원과 오는 경우가 많다), 운이 없어 초보들이 많은 팀에 배정된 경우 2~3시간 내내 볼넷과 에러의 향연 속에서 수비만 하다가 집에 가기도 한다. 공식 경기가 아니니 경기 기록도 없고 아무래도 심판들도 리그보다는 좀 대충 판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감수할 만큼 용병 야구는 특유의 장점과 매력이 있다. 리그 게임이 없어 지루한 주말이 걱정인 야구인이시라면 용병 야구를 시도해보는 것을 강력 추천드린다. 리그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