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차 직장인, 갑자기 일본으로 이주하기
여기서 착각은 금물. 외국어에 대한 마음의 불씨가 지펴졌다고 해서 갑자기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을 리 없다. 9-6로 회사도 매일 다니고 있고 J와 연애도 시작했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놓칠 수 없고, 주말엔 가끔 본가도 가야 했으며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하여튼 일상이 너무 바빠서 외국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쉽사리 들지는 않았다.
연애를 시작한 지 4개월쯤 됐을 때 즈음, J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분명 나를 처음 만났을 땐 언제 일본에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고 했었는데, 너무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고있는 집을 비워두고 해외에서 (J기준 해외는 한국) 재택을 했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가 보긴 해야 했다. 꿈이길 바랬으나 다시 일본에 돌아가도 금방 다시 한국에 너를 보러 올 것이며, 지금 J가 근무하고 있는 기업에 한국 지사도 있으니 그곳으로의 발령도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꿈이길 바랬으나 예상을 전혀 못하던 일은 아니었다. 다만 J를 처음 만날 당시만 해도, 그가 언제 한국에 돌아갈지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장거리 연애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그를 만나지 않았다. 또 오랜만에 시작한 연애였고 그전에 하도 연애에 데어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J에 대한 마음의 문을 천천히 열어가며 마음의 크기를 조절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래서 이 관계에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조금 방어적으로 나의 마음이 크지 않길 바랬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설마 장거리 연애까지야 하겠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시간이 하루, 이틀, 한 달씩 지나가며 쌓여갈수록 이전 연애와는 다르게 이 친구와 같이 하는 미래를 자연스레 그려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 과정을 표현해보자면 무려 같은 MBTI를 보유한 ESFJ 커플이었달까. 평소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경제관념 그리고 일상을 보내는 루틴이나 생활 방식 등도 꽤 닮아있는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건 나중에 들어보니 J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이 에세이는 연애 에세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J는 10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진심으로 한국에 들어올까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종종 "요즘 고민이 뭐야?"라고 물어보면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올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답했다. 가끔 카페에 앉아서 각자 노트북을 두들기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노트북 화면을 골똘하게 쳐다보며 무언가를 고민할 때면 그가 그의 모든 커리어를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와 일자리를 찾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 기업의 파트너나 임원들을 만나 일자리 논의도 하였다.
다시 한국에 오든, 오지 않든 J가 일본에 한 번은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음에 "금방 다시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J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처음으로 3개월간 장거리 연애를 했다. 그리고 3개월 뒤인 7월 J는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2개월 있다가 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장거리 연애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이다.
그즈음 회사에서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는데, 한국-미국-일본 3개의 기업 거점을 연결하는 미팅을 어레인지 하는 일이었다. 그 프로젝트는 한국어와 일본어 동시 통/번역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 관건이어서 일본 통역사들을 동원해야 했는데, 미팅 당일 날에 급하게 공지문을 내보내야 하거나 갑자기 일본 직원들이 일본어로 댓글을 달거나 하면 바로 통역사에게 일일이 요청할 수 없어 돌발적으로 난감한 일들이 생겼다. 팀원들이 일본어를 읽지 못하니, 통역사가 번역해서 주어도 다른 질문의 답변으로 갖다 붙이기도 하는 실수들도 발생하였다. 다행히 현장에서 시스템 업체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개발자분이 임기응변을 발휘하시어 일본어 응대를 해주셔서 별 큰 사고 없이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날 밤, 침대에 누워 오늘의 현장을 복기해보며 '언어를 하나 더 한다는 것의 메리트가 이렇게나 크구나.'라고 생각했다. 2-3가지의 언어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상황이라면, 그 현장에선 일을 잘하는 사람보단 언어를 잘하는 사람이 더 우선일 수도 있겠구나. 사실 '일을 잘하는 것'의 기준은 어느 조직인지, 어느 상황에 있는지에 따라서 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변하지 않는 나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송이인 나는 대학 전공인 '법학'도 살리지 못했고, 빠르게 취업하기 위해 경영학과 수업도 들어보고 여러 대외활동도 하며 스펙을 쌓은 것도 맞지만 경력이 5년 차가 넘어가니 대학시절 했던 대외활동은 경력기술서에 한 줄 넣지도 않게 되었다. 오히려 교환학생을 갔던 학력은 한 줄로 넣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글로벌 기업에서 앞으로도 일을 한다면 이런 프로젝트가 계속 생길 텐데 외국어처럼 한 가지 기술로서 바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도 사회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좋은 스펙이자 무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장거리 연애 8개월 차에 글로벌 프로젝트를 겪으면서 ‘그래, 당장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보자.'는 결론에 드디어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