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방 : 그레이네상스, 다시 피어나는 꽃
“엄마! 나 또 실패야! 아오, 진짜 서버 터졌나 봐!”
2024년 5월,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 콘서트 예매일.
딸의 비명 소리에 김명자(65세) 씨의 어깨가 축 처졌다.
벌써 3년째다.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이라 불리는 임영웅 콘서트 예매 전쟁.
효도 한번 해보겠다고 PC방까지 간 딸도, 돋보기 쓰고 스마트폰을 두드린 명자도 이번에도 '광탈’이었다.
“괜찮아... 엄마는 TV로 보면 돼. 영웅이 얼굴 크게 나오고 더 좋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명자는 방에 들어와 몰래 눈물을 훔쳤다.
덕질 메이트였던 ‘인천 댁’ 언니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명자야, 죽기 전에 우리 영웅이 콘서트 한번 같이 가자"던 약속을 못 지켰다. 그게 천추의 한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TV 속 임영웅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고 있었다. 내 이야기 같아서,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바람이나 쐬러 나간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팬카페 글을 읽는데, 화면 위로 파란색 나비가 날아다녔다. 홀린 듯 나비를 따라가니 공원 화장실 뒤편에 낯선 포토부스 같은 것이 있었다.
[시간의 다방 - Hero Ticket Box]
커튼을 걷고 들어가자 온통 하늘색으로 꾸며진 좁은 공간이 나왔다.
부스 안에는 키오스크 기계가 한 대 놓여 있었고, 그 옆엔 하늘색 후드티를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명자는 단박에 알아봤다. 그였다. ‘건행’ 청년 임영웅.
“어머니, 티켓 못 구하셨어요?”
청년의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명자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머, 어머! 영웅 총각? 아니, 가수님?”
“쉿, 비밀이에요. 어머니가 너무 슬프게 우셔서 제가 특별히 모셨어요.”
청년이 키오스크 화면을 가리켰다.
“자, 어머니의 선택입니다.”
“VIP 초대권을 누르시면, 3년 전 첫 단독 콘서트로 보내드려요. 인천 댁 언니랑 같이요. 제일 앞자리에서 제 손잡고 노래 부르실 수 있어요. 언니 소원도 풀어주고, 어머니 평생의 한도 푸는 거죠.”
“매크로 프로그램을 누르시면, 미래의 최첨단 티켓팅 AI를 드려요. 앞으로 10년 동안 제 콘서트는 무조건 1열 자동 예약입니다. 딸 고생 안 시키고, 팬카페에서 '금손 할매’로 추앙받으며 사시는 거예요.”
“취소표 대기를 누르시면... 그냥 지금처럼 사셔야 해요. 운 좋으면 가고, 아니면 말고. 대신 딸이랑 티켓팅 실패하고 떡볶이 사 먹는 그 소소한 재미는 계속되겠죠.”
명자는 손을 떨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3년 전. 인천 댁 언니가 살아있던 시절.
언니 손 잡고, 하늘색 티셔츠 맞춰 입고 응원봉 흔드는 상상.
언니가 병상에서 "영웅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이 티켓을 내밀었다면 언니가 그렇게 쓸쓸하게 가진 않았을 텐데.
‘블랙? 소소한 재미? 다 필요 없어. 난 언니랑 약속 지킬 거야.’
“영웅아... 아니 가수님아.”
명자는 눈물을 닦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우리 언니 만나러 갈래. 가서 신나게 놀아주고 올래.”
“후회 안 하시겠어요? 이건 딱 한 번뿐인 기적이에요.”
“후회는 무슨. 내 평생 소원인데.”
명자는 'VIP 초대권' 버튼을 꾹 눌렀다.
띠링-! 영롱한 소리와 함께 티켓 두 장이 출력되었다.
임영웅 단독 콘서트 - 1열 1번, 2번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명자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준비되셨죠? 건행!”
눈을 뜨니 2022년. 고척 스카이돔 앞.
하늘색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명자야! 이게 무슨 일이니! 우리가 당첨됐어!”
건강한 모습의 인천 댁 언니가 명자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언니...”
명자는 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 살아있었다.
두 할머니는 소녀처럼 손을 잡고 공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명이 켜지고, 무대 위로 임영웅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영웅시대 여러분!”
명자와 언니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사랑해! 임영웅! 우유빛깔 임영웅!”
임영웅이 명자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명자는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옆에서 언니가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울고 있었다.
“명자야, 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고맙다, 진짜 고맙다.”
그날 밤, 명자는 꿈에서 깼다.
다시 2025년의 아침. 언니는 곁에 없었다.
하지만 명자의 손엔 왠지 모를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가슴속엔 평생 꺼지지 않을 환한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도 언니 소원을 이뤄줬으니까.
명자는 핸드폰을 들어 팬카페에 글을 남겼다.
제목: 인천 댁 언니랑 콘서트 다녀온 꿈 꿨어요. 언니가 너무 행복해하네요.
댓글이 수백 개가 달렸다.
‘어머님, 언니분도 천국에서 1열 관람하고 계실 거예요.’
명자는 하늘을 보며 웃었다.
“언니, 거기선 티켓팅 필요 없지? 나 갈 때까지 실컷 보고 있어!”
[작가 노트]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과 딱 한번 되돌아 갈 수 있는 과거의 순간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