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측면을 바라봄에 있어 인문학 번역서를 읽는 것은 결코 쉽게 감내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둔다. 명성이 높은, 그야말로 문필가에 어울리는 저 이국의 저자들이 자신의 지식을 기만적으로 늘어놓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읽기라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을 통해 명백히 알아낼 수 있음이 확실하다. 나는 번역서 특유의 그 번역투에 관대한 편이라고 스스로 믿어 왔지만 그 책은 나의 기대를 벗어나는 바가 있어 나의 비판을 스스로 자초하였으니 이것은 내 분열적이고 비판적인 성정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 난 지금껏 글의 내용이 아니라 글의 외형의 판단이라는 부차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번역자가 '옮긴이의 글'마저 그런 식으로 썼는지를 확인 과정을 통해 알아보아야 할 정도로 이 인문학 번역서의 문장은 자기부재를 증명하는 바가 있었다. 난 글을 읽는 도중 같은 문장을 여러번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직 그런 방식을 통해서만 독해의 어려움이 해결되어 가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것도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오로지 나의 잘못 때문은 아니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그게 어찌 오로지 나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가히 문고판이 아닌 양장본의 구입은 이것을 오랫동안 장서로 보관하며 서고를 바라보는 기쁨을 채우기 위함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드는 생각이라는 것은 이 책의 번역을 상당히 개정하는 수고를 거쳐야 비로소 양장본으로의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 앞에 서면 스스로를 낮추는 버릇을 지니고 있는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을 독서하며 따라오는 난해함이 인문학의 위대함과 고결성 그리고 스스로의 무지 때문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인문학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스스로 울타리를 치며 가두어져 가는 것 그리고 그 특유성과 유사함이다.
사실 인문학 번역서들의 이러한 번역 방식은 그 오래된 일관성을 통해 어떤 의아함을 상기시키는 바가 있다. 출간이라는 빛나는 탄생을 이뤄내기에 앞서 번역자와 출판사가 처해 있는 어려움이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듯 오래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맞춤법만 프로그램으로 한번 돌려보고 출생되어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출판계와 번역자가 처한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로 들어설 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제가 라틴어 성경을 독식했듯이 이 특유의 문체를 독점하여 대중들이 감히 이해하고자 들지도 않도록 인문학이란 성역의 바벨탑을 쌓을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일종의 신앙고백 삼아 두 번째 사유로 제시할 것인가?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은 나 역시 훌륭한 모범을 보일 만한 능력이 되지 않으면서도 번역자의 노고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공정과 정의의 문제는 내 이런 적의가 근거 없음을 증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에 따라 나는 이러한 것들이 변증법적으로 흘러가기를 희망하며 이것이 나의 중의적 표현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지적은 사실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나도 이러한 글들의 영향을 받고 자랐음이 명백하고 나의 글들을 되돌아보면 이런 번역투를 적지 않게 발견해 낼 수 있음이 자명하다. 명망이 높은 문필가, 소설가, 인문학자의 글에서도 번역투는 그 기반을 온당하게 잃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권장되어지기도 한다.
번역투에 관한 제재가 엄숙주의자들이 촉발시킨 히스테리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엄숙주의자들의 지적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 가능한 애매모호한 기법으로 회피하고 정당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그 문제는 그 정도가 어느 정도 확증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관련 있다. 그러한 자율성이 일차적으로 특정 기준율을 넘어설 때 그것은 스스로 어색한 사유의 낯빛을 보이고 그 덕분으로 대중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서투른 반성을 기반으로 인문학의 눈부신 도도함을 자학적으로 연출시키며, 그와 동시에 나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어두운 문장의 시대로의 예속이라는 언어 스스로 증명해버린 이 현상을 카프카 언급했던 '자살을 향한 도움닫기'와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비변증법적 사유라는 딱지가 붙여짐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벤야민이 그랬듯이 나 역시 비변증법적 사유에 매료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