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는 뽑으셨어요?
암시장을 떳떳이 이용하는 방법
예전에 업무차 지방에 들른 적이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길을 걷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미리 날씨를 확인하고 떠난 길이었지만,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비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근처에 마트가 있었다. 그 마트는 주택 단지 인근의 소형 상점이 아니라 전국의 주요 도심에 같은 이름의 지점을 두고 있는 대형마트였다. 대형마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여럿 건설했던 것처럼 새로운 지역에 점포를 열며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기업형 슈퍼마켓으로, 이들은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하나로 융합하려 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세상의 온갖 제품들을 한 곳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망가진 문짝에 쓸 볼트 하나를 구하고자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공구들이 잘 진열된 상쾌한 공간에서 쇼핑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변방의 헐벗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추방한 뒤 황금으로 치장한 알렉산드로스를 신전으로 안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 역시 이 헬레니즘이 신전에 기쁘게 발을 디뎠으니, 이곳에 지금 내게 필요한 우산이 있으리란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도 사용했던 지도를 이 대형마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글자와 그림이 일부 떨어져 나가고 비만 오면 녹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비둘기 똥에 서서히 부식되어 가더라도 유지보수 비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몇 년째 방치해 두곤 하는 그 지도 안내판 말이다. 관광지와 공원 입구에 지도부터 세우고 보는 지방자치단체들과는 아주 다른 양상이 대형마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그건 대형마트 특유의 자부심, 즉 이곳을 방문하는 자는 이 호화로운 광경에 놀라 마트 전체를 둘러보게 될 것이므로 굳이 지도가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일이었다. 현대인들은 대형마트를 단순히 물건을 사는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산책 코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물건의 상세 위치를 기록해 놓은 지도는 별 쓸모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다가 원하던 물건뿐만 아니라 애초에 생각지 않았던 불필요한 물건까지 사두는 것이 이 제국에서 살아가는 미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한 사람도 대형마트를 이용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건물 내 주요 상품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가 없으면 꽤 불편하다. 나처럼 시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익숙지 않은 마트를 방문하면 곤혹스러울 수 있다. 이때 마트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거대한 공간 속 어딘가에 있을 직원을 찾다 보면 곧 현실판 '월리를 찾아라'를 체험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차이점이 있다면 이곳의 월리는 한 곳에 멈춰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찾아낸 월리, 아니 마트 직원에게 우산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니 손으로 직선 한 번과 물결 한 번 그리고 개구리가 뛰어넘는 듯한 곡선 두 번을 그리고는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내가 목격한 것은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따뜻한 물을 기다리며 계속 찬물로 샤워를 하는 바쁜 근로자들의 일상과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를 처음 만나 느꼈을 난감함이었다.
나는 점원이 그렸던 상상의 선을 생각하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두 번 올라간 뒤 신사화, 숙녀화, 여성 속옷, 등산복, 화장실, 신사화, 숙녀화, 고르디아스의 매듭, 간다라 미술, 장난감, 반려동물, 푸드코트, 신사화, 숙녀화 코너를 지나 마침내 우산 진열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매대에는 여러 종류의 우산이 걸려 있었다. 삼단 접이식 우산, 이단 접이식 우산, 양산, 기다란 우산이 있었는데,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하여 고민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대중적인 이단 접이식 우산을 고른 후 곧장 계산대로 갔다.
마트에서 운영하는 계산대는 4개였는데 줄마다 대기 인원이 최소 3명이 넘었고 각자의 카트엔 물건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난 우산 하나만 사면 되는데 계산대 앞에서 꽤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란해졌다. 아이폰을 사기 위해 매장 앞에서 밤새 줄을 섰던 사람들은 내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디오게네스도 통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 아이폰이었고, 내가 사려 했던 것은 그저 내 몸을 가려줄 평범한 우산이었다. 게다가 시간도 촉박했다. 앞사람들에게 양보를 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예전에 있던 소량 물품 계산대가 돈을 적게 쓴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없어져 버린 것을 생각하니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내가 단 하나만 계산하면 된다는 이유로 먼저 줄을 서 있던 사람들에게 양보를 요구할 권리는 없었다. 오천 원을 쓴 소비자가 이십만 원을 쓴 소비자보다 우선할 자격이 있는가? 혹 이들이 내게 양보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집에 가서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을 해?" 하며 분노를 터트릴 수 있었다.
하릴없이 한참을 기다려 계산을 끝마친 뒤 건물의 입구로 나와 서둘러 우산을 펼쳤다. 그런데 아뿔싸. 우산의 기둥이 살짝 휘어 있어서 펴지지 않았다. 황당한 일이었다. 힘을 주어 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난 재빨리 환불 절차를 밟기로 했다. 대형마트의 장점이 뭔가. 바로 간편한 교환과 환불 절차 아니겠는가.
고객센터에 가보니 몇 명이 줄을 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난 그 뒤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앞사람이 모두 볼일을 마치고 나가자 난 내 앞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우산을 환불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직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시 한번 목적을 말했다. 그러자 직원이 물었다.
"번호표는 뽑으셨어요?"
직원은 환불 절차가 아니라 번호표 확인 절차에 들어갔다. 난 번호표라는 게 영수증을 의미하는가 싶어 영수증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그게 아니라 내 뒤에 있는 기계에서 번호표를 뽑아와야 한다고 일렀다. 은행에서 볼 수 있는 대기 순번 같은 것이었다. 난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으며 한참 동안 줄 서 있었다고 항의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난들 별수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뒤에 있는 손님에게 손짓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번호표를 뽑고 순번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환불을 받고 다시 우산 판매대로 갔다. 우산 하나를 사려고 마트에 들어온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번에는 우산을 한 번 점검하는 수고를 한 뒤 나는 듯 달려 계산대로 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도 내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계산을 끝내고 마침내 로비로 나올 수 있었다. 대형마트의 거대한 유리문을 몸으로 밀어젖히며 우산을 펼치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비가 멈춘 것이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났다. 일기 예보를 놓치는 바람에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야 하는 일이 또 생겼다. 그렇게 고생했으면서도 금세 나태해지고 만 것이다. 내 앞에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같이 입점해 있는 마천루가 있었다. 지난번의 일이 떠올랐다. 참으로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편의점은 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때, 백화점 앞 지하철 입구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초라한 행색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날 힐끔 쳐다보더니 내게 다가와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의 손엔 여러 개의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날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며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난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빛의 제국을 힐끗 보았다. 그리곤 그의 손에 이끌려 암시장의 신속한 세계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