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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Sep 04. 2020

모바일 청첩장은 받지 않습니다

소비 사회의 구매 욕구를 정당화하는 방법

며칠 전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인체 해부 모형을 구매했다. 나에게 없으면 안 될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ㅡ그런 물건이 몇이나 되겠는가ㅡ장기적으로 보면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구매를 결심했다. 이 실물 크기의 모형은 여러 장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할 수 있으며 사방에서 입체적으로 둘러볼 수도 있어서 컴퓨터 모니터나 종이 인쇄물로 보는 것과는 체험의 수준이 달랐다. 모형을 방 한쪽에 세워 놓고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폐와 심장의 겉 부분을 떼어내 보았다. 곧 좌심방과 우심방 내부가 드러났고 내 가슴은 심장을 교과서의 그림으로 접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호기심으로 두근거렸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체 해부도가 훨씬 자세하고 가격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데 뭐하러 큰돈을 들여 인체 해부 모형을 사는가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져볼 수 있다는 것 외엔 장점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만져볼 수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것도 입체적인 조각처럼 사방에서 구경하며 만져볼 수 있다. 당연히 모니터나 종이 같은 평면적인 도구로 인체 해부도를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휴대전화나 텔레비전 대신 장난감을 쥐여주는 이유는 시각 정보에 의존한 체험보다는 오감을 사용한 체험이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 훨씬 유익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무조건 그림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면 조각과 회화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옛 예술가들의 사례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바사리는 아주 겸손한 문체로 두 예술 사이에 우열의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감각적 체험이 모형 구매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전부는 아니다. 가장 근원적인 이점은 내가 그것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는 상태 그 자체에서 온다. 디지털 모니터 안의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며 마치 그것이 나의 것인 양 현혹했지만 실재의 소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내가 회원을 탈퇴하거나 가입을 해지하면 어쩔 수 없다는 위로의 말을 전하며ㅡ다시 가입하면 예전의 혜택을 영원히 누릴 수 있다는 약속과 함께ㅡ내가 누렸던 소유의 기쁨이 만질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일깨웠다.


소유가 왜 중요한가? 지금도 유령처럼 떠도는 카를 마르크스는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할수록 삶이 소외된다고 주장했는데, 그와 반대로 현대의 디지털 혁명은 소유하고 있는 듯한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삶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 것으로 생각했던 사물은 TV를 끄거나 네트워크를 단절시켜 버리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환영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행복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환영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무소유의 기쁨을 느낀 것이 아니라 강렬한 집착에 빠지고 말았다. 인간이 TV를 위시한 시각 정보에 쉽게 중독되는 이유는 소유라는 환영을 오로지 그곳에서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고 가난할수록 대중 매체에 중독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는 이를 반영한다. 단순히 양육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서 아이들이 TV와 인터넷에 중독되었다고 해석하는 건 사건을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소유라는 실체가 제거하는 거짓 환영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TV 속 캐릭터에 오래도록 집착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TV 좀 그만 보라며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 TV 속 캐릭터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우리가 사춘기 시절 눈물을 흘리며 떠나보낸 첫사랑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TV 스위치를 강제로 꺼버리는 것보다는 만질 수 없던 환상을 만질 수 있는 실체로 재현하여 주는 것이 낫다. 환영이 실재가 되면 아이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싸구려 인형이라도 손에 들게 되면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TV 속 캐릭터가 막상 자기 손에 들어오면 염증에 빠져 5분 만에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제야 TV 속 캐릭터에 서서히 흥미를 잃는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실제의 삶을 추동하는 소유 욕구와 그를 가능케 하는 소비 능력이 얼마나 막대한 힘을 지녔는지를 일찍부터 깨우치게 된다.


이런 일들을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으로만 치부하지 않기를 바란다. 바람둥이들도 이 효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유도하는 데 능숙했다. 평범한 우리에게도 결혼이라는 계약이 꼭 그런 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의 결혼은ㅡ좋은 뜻에서건 나쁜 뜻에서건ㅡ우리를 현실로 이끈다. 그 현실이 비참한 결말을 부르기도 했지만, 그건 <신데렐라>나 <행복한 왕자> 같은 동화에 너무 오래 심취해 있던 탓이다. 이제 미디어의 환영이 일으키는 무절제한 중독과 주류 사회와의 단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실체적 소유라는 치료제를 제때 사용하는 것뿐이다.


현대인들은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이 치료제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인체 해부 모형을 예로 들었지만 보편적인 예시로는 앞서 이야기한 결혼, 그중에서도 결혼 청첩장이 적합할 것이다. 결혼 소식을 알리는 데 쓰이는 이 초대장은 크게 종이 청첩장과 모바일 청첩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는 쪽은 종이 청첩장이다. 친척이나 친한 친구에게는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으며, 모바일 청첩장을 받았다면 축의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일반론이 결혼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실 만드는 어려움으로만 따지면 모바일 청첩장이 더 값진 대우를 받아야 한다. 판에 박은 몇 개의 문장과 약도 정도를 그려 넣은 게 전부인 종이 청첩장과는 달리, 모바일 청첩장은 신혼부부의 만남부터 결혼에 이르는 장대한 스토리를 단편 영화 못지않은 흥미로운 영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다. 종이 청첩장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바일 청첩장과 다를 바 없고 부부의 수기 서명조차 들어가 있지 않아서 특별한 구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모바일 청첩장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다. 종이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은 펜으로 정성스럽게 작성한 노트를 접하는 기분으로 종이를 쓰다듬으며 그 감촉에 빠지고, 모바일 청첩장을 받은 사람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긴 채 축의금으로 얼마를 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어떤 이들은 모바일 청첩장에 접속하고자 할 때 눌러야 하는 링크 주소가 모바일 청첩장이 맞이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사이버 세계는 믿을 수 없는 범죄로 가득하므로 영문 대문자와 소문자가 기이하게 나열된 청첩장 주소를 보는 순간 초대받은 자는 지옥의 입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행복을 위조해 놓은 모바일 청첩장 특유의 과시적 영상과 사진은 예비부부의 허위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그 때문에 수신자들이 불쾌한 감정에 빠지게 되어 모바일 청첩장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지면이 한정적인 종이 초대장으로는 자랑하려야 할 수가 없고, 그 덕분에 자랑하는 자들에게 떨어지기 마련인 신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난 소유의 문제를 강조하고 싶다. 소수의 귀족과 자본가 계급 중에서도 특별한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초대권은 결코 모바일 메시지 따위로 전송되지 않는다. 이들의 세계는 반지나 목걸이 혹은 금빛 카드에 새겨진 특별한 기호, 얼굴 그 자체, 하다못해 손목에 그려 넣은 문신으로 출입의 경계를 구분한다. 그런 기호는 자격을 증명하는 소유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라지지 않으며 소유자에게 영원히 종속된다. 평범한 우리에게는 결혼식의 종이 청첩장이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 실재하는 종이 청첩장이 전해지는 순간 우리 역시 특별한 존재라는 기호가 떠오르며 우리를 대중이라는 수동적이고 무가치한 상태에서 구원한다.


무엇보다 종이 청첩장은 결혼식장의 어느 누구도 청첩장의 소유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데서 그 특유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과시한다. 예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도 예식장을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놔둠으로써 나름의 정성을 들여 만든 청첩장이 대충 인쇄한 식권보다도 못하다는 걸 입증하는 듯하지만 이는 진실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VIP들이 에르메스 가방에 들어 있는 허가증을 꺼내 경비원들에게 천박하게 흔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경비원들은 당연히 모든 VIP의 얼굴을 알고 있어야 했다. 카드에 미리 RFID 칩을 심어두거나 얼굴 인식 프로그램이라도 가동해서 VIP들이 출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국제 모터쇼 행사장 입구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가로막으며 초대권을 제시해 달라고 말하는 경비원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보자. 경비원의 처지와 아무 상관 없는 인터넷 대중은 원칙을 고수한 그를 칭송할지 몰라도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는 경비원은 어두운 주차장에서 무릎이 꿇린 채 뺨을 맞는다. 우리도 결혼식장 입구를 제지 없이 통과하며 그런 황홀한 권력에 취해볼 수 있다. 따라서 지인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경계에 놓이게 된다. 특별한 자격을 지닌 한정된 손님, 혹은 무한대로 뿌려질 수 있는 무가치한 인터넷상의 아무개.


그러니 우리가 모바일 청첩장을 받자마자 소외된 대중의 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빠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바일 청첩장 따위를 받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절규의 기저에는 그런 심리가 깔려 있다. 이제 지구를 살리겠다며 화장지를 전혀 쓰지 않던 환경보호 운동가도 결혼할 때는 종이 청첩장을 사용한다.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소유욕과 평화가 배척 관계에 있다고 했던 에리히 프롬의 주장은 하나의 거대한 착오였다.


여러 할 말이 남았지만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집에 돌아온 아내가 방에 세워둔 인체 해부 모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집에 숨어 있던 한니발 렉터를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이 거대하고도 해괴망측한 해부 모형은 대체 뭐냐고 묻고 있다. 난 미디어의 환영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아내에게 이 글을 보여줄 생각이다. 잘 되면 액시스 과학사에서 특별한 손길로 제작한 실물 대비 3/4 사이즈의 기관지-폐 모형이 다음 주쯤 내 손에 들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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