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된 태도를 말하는 방법
신호등이 적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을 때였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일행에게 "파란불이다, 건너자."라고 말했다. 그는 신호등의 녹색불이 두고 파란불이라고 했다. 난 이런 경우를 꽤 자주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먼저 그들이 색각이상을 겪고 있다고 추측해 보았다. 그들은 적록색맹으로 고통받고 있어서 신호등의 녹색을 다른 색상으로 인지한다. 그럴듯한 가설이었지만 색맹이 아닌 사람들도 파란불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나도 모르게 파란불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난 그런 질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빨노파'라는 색의 삼원색에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신호등의 세 가지 색깔 중 두 개가 빨강과 노랑이다. 빨강과 노랑, 그러면 자연스럽게 파랑이 떠오른다. 따라서 신호등의 빨간불, 노란불 다음으로 파란불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그럴듯한 면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색의 삼원색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빛의 삼원색은 빨강, 파랑, 초록이다. 모니터 보급으로 익숙해진 용어인 RGB 역시 빨강, 파랑, 초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녹색도 인지도에서 밀리지 않는다.
이런저런 가설들 사이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우연히 한 사람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는 십 년에 걸쳐 일관되게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는 인물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여성주의자에다 진보주의자였으며 고리타분한 걸 싫어할 뿐만 아니라 열린 사고와 침잠하는 고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런 사실을 글로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글에서 묘한 모순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했지만 어느 부분에선 대단히 보수적이었고, 스스로 열린 사고를 갖추고 있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에 대단히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가령 그는 글을 쓰거나 말할 때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에 체질적으로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또 영어를 섞어 쓰는 동료들의 행태를 에둘러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그가 다음과 같이 쓴 걸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슬픈 엔딩......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을 모두 소진하고...... 난 이제 스트라이크 아웃...... 이건 내 존재의 백그라운드를 찾아가는 여정......" 이건 무수한 사례 중 몇 가지를 축약하여 적은 것이다.
다른 사례도 있다. 그는 부하 직원의 의견에 반대하는 상사를 두고 꽉 막혀 있다고 힐난하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비판하는 글을 남기면 "내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긴 하지만 이건 도저히 상대해줄 수가 없다."라면서 격하게 반발하곤 했다. 또 나이 든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인 "너도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된다."라는 말을 그렇게 싫다고 하면서도, 어떤 글에는 "나도 이런 걸 좋아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라면서 사람은 역시 나이를 먹으면 변하게 된다고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열린 생각을 하며 고요를 좋아한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지만, 실상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좋게 반응해주는 사람들뿐이었고 사고에서도 고요가 아닌 각개전투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태도엔 충격적인 데가 있었고 그래서 때때로 찾아가 읽어보곤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글이 놀랍게 느껴진 건 그걸 글로 읽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모순적 행동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라 그리 놀랄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온건한 강경주의자, 자신에게는 긍정적인 회의주의자, 자신에게는 주관적인 객관주의자, 자신의 친인척에게만 민주적인 독재주의자, 실로 많은 사례가 있었다. 누가 이런 모순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절대적인 잣대 없이 그저 우리 편한 대로 살아간다.
바로 그때, 이 '편한 대로'라는 단어가 파란불 때문에 고민하던 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녹색불 대신 파란불이라 말하는 건 단순히 발음하기 편해서가 아닐까? 빨간불, 노란불, 파란불에는 읽기 편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반면 녹색불은 파란불보다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즉 우리는 실제의 색이 아니라 발음하기 편한 색을 골랐다. 우리는 녹색불이라는 실체 대신 파란불이라는 허위를 택했다. 신호등의 색깔이 실제로 파란색이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목적은 길을 건너는 것이니 뜻이야 통하면 그만이었다. 거기다 발음하기까지 편하니 나쁠 게 없었다. 난 이에 관한 논문을 써서 학회에 제출했고 며칠 뒤 답변을 받아볼 수 있었다.
"친애하는 김영욱 씨, 우리 <다양한 사례 분석을 통한 열린 소수 학회>에 논문을 제출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심사 결과, 우리 심사위원 2인은 신호등의 녹색불을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사례를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해당 논문을 심사에서 제외하게 되었음을 아쉬움을 담아 통보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도 파란 잎사귀가 거친 땅에서 돋아나듯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난 통지문을 바라보다가 파란 나뭇잎으로 가득한 숲을 상상해 보았다. 멀리서 보면 그 숲이 바다처럼 보일까? 난 통지문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신호등의 녹색불을 파란불로 변경하자는 범국민시민운동을 벌이기 위해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