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입장이 되어야 그 입장을 이해한다
'아들 손에 반찬을 싸 보내는 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엄마로서 큰 기쁨인 것을 이제야 알아봤다.
오래도록 부족한 엄마였다. 엄마로서 느낄 수 있는 기쁨도 챙기지 못했다. 나는 그 주요 원인을 나의 부모 자아와 어른 자아로서의 미성숙이라 본다.
지난 12월 김장철의 이야기이다.
신혼인 아들 집 김장 걱정이 올라오면서 젊은 시절 내 가정, 며느리와 주부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김장' 하면 떠오르는 두 분이 계시다.
친정아버지께서는 고단한 젊은 날을 사셨다. 70세가 훌쩍 넘으신 연세에 농사를 시작하셨다. 임자 없는 야산에 텃밭을 일구셔서 밭농사를 지으셨다. 처음 하시는 농사임에도 친구분들의 조언을 받으며, 혼자 개척하셨는데, 늘 결실이 좋았다. 고구마도 어찌나 크고 실한 지, 맛도 끝내줬다. 자식 농사보다 농작물을 더 잘 키우신 것 같다.
가을이면 실한 배추와 빨간 태양초를 제공해 주셨다. 한 3년 간은 아버지 덕분에 집에서 김장을 담갔다.
직장인이라 퇴근 후에야 김장에 필요한 준비를 한 가지씩 했다. 주말에 배추를 절구어 밤사이 뒤집고 새벽에 씻어댔다. 그 당시에는 직장인이라 김장하는 일이 꽤 힘들고 귀찮았다.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지어 주시는 배추와 고춧가루여서 마지못해 했다.
그것이 15년 전 이야기다. 그 아버지는 이제 안 계시고, 알토란 배추나 빨간 고추를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넓은 밭에 빨간 고추가 무겁게 달려 피무덤을 이룬 듯 보일 때쯤 어느 날, 빨간 고추밭을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셨다.
친정아버지 덕분에 김장을 해 보았다. 그때뿐이었다. 김장 때만 되면 갈색 점퍼와 두툼한 바지 차림으로 밭에서 일하시며 싱글벙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그립다.
신혼부터 주말에 어머니 댁에 가면 늘 반찬을 챙겨주셨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생각해 살뜰히 챙겨주셨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그 맛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갈 때마다 싸주실 게 없나 늘 챙기시고 싸주시는 어머니께 죄송해서 주실 때마다
"어머니, 괜찮아요. 저희가 알아서 먹을 테니, 어머니 드세요."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오히려 맘이 상하시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안다. 챙겨주시는 어머니 마음이 훨씬 흐뭇하시다는 것을 말이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그래야 했다. 난 그런 면에서 제대로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했고 말도 예쁘게 하지 못한 며느리였다.
젊은 날 어머니께 많이 얻어먹어서 이제 가끔은 어머니께 내가 만든 반찬을 챙겨드려야 하는 게 맞다. 연로하신 지금도 어머니께서는 손수 잘해 드신다. 지금도 어머니는 요리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며 척척 하신다. 명절 음식과 가끔 밑찬이라도 보내면, '우리 며느리께 음식도 얻어먹는 날이 오네.' 하시며 좋아하신다.
반찬뿐 아니라 김장 때가 되면 늘 우리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내게 시누인 따님들과 김장을 담그셔서 우리 몫을 챙겨주셨다. 주말에 하실 때는 함께 김장을 돕고 우리 것을 챙겨 왔다. 그렇게 김장은 당연한 듯 어머니께 얻어먹었다.
요즘처럼 배추와 각종 재료가 비쌀 때면 넉넉지 않은 살림에 어찌 감당하셨을까나. 나는 지혜롭지 못해 거저 얻어먹기만 했다. 당연히 김치 몫으로 용돈이라도 더 챙겨드렸어야 했다. 후회감이다. 싹싹하게 인사말이라도 잘했으면 좋았으련만... 쩝.
그렇게 젊은 날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 덕분에 먹고살았다. 그러다 보니, 60이 된 이 나이에도 요리하는 게 어설프다. 그런 내가 며느리를 맞았다. 생각 끝에 요즘엔 밀키트 시대니까, 살림이 전공이 아닌 나는 새 시대 며느리랑 함께 밀키트 시엄니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첫 김장철이 왔다.
친구가 맛있는 집김장 김치를 살 수 있다고 해서 친구를 통해 김치를 주문했다. 봄까지 먹으려는 생각으로 넉넉히 주문했다.
김장김치를 받고 하루가 지났다.
갑자기 아들이 떠올랐다.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아들집 김치는?'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반찬은 밀키트 시대라지만, 김장은 좀 걸렸다. 다른 때는 조금씩 사 먹으면 되는데 이번 겨울 김장은...? 아차 싶었다.
'너 ㅇㅇ, 이제 시엄니 됐어. 뭐 해? 아들 며느리 맞벌이잖아. 적어도 반찬 실어 나르지 않으면 김장김치는 해줘야는 거 아님? 너도 다 어머니께 얻어먹었잖아.'
'에고~ 나 엄마였네. 혼자도 아니고 이제 둘이 먹을 거니 챙겨야 하네.'
내면에서 자성의 소리마저 들려왔다. 어머니께 늘 얻어먹었으면서 넌 아들 집 챙기지도 않느냐고 말이다.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미안하게도 아들네 식생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화해서 물었다.
"반찬으로 뭐 해서 먹니?"
나도 잘 모르니, 이런 일에 자상한 엄마는 못된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과 생각은 필요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관심 가지고 시어머니로서 필요한 건 해 줘야지. 아닌가...? '에이 모르겠다. 필요해하면 해주고 싫다 하면 말고.'
아들은 무조건 잘 먹고 산다고 한다.
"이번에 엄마 김장 김치 샀어. 다행히 많이 샀으니까 몇 포기 줄게. 못 담가 주니 사서라도 주마."
"엄마, 며칠 지났으면 익은 거 아냐?"
"아냐 냉장고에 즉시 넣었으니 괜찮아."
아들은 관심 촉을 세우고 맛부터 있냐고 묻는다.
아들은 금세 한 생김치를 좋아한다. 입맛 다시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야들도 김장 생각 하나 없었던 게다. 김장도 전통이 되려나 보다......
김치맛이 궁금했는지 통화한 후 채 이틀이 안 되었는데 버스 타고 달려왔다. 차를 끌고 와야지 했더니 들고 갈 만큼 두 포기만 달란다. ㅎㅎ
한 포기만 썰어도 일주일 먹는단다.
에고, 예전의 누군가도 늘 그랬다.
어머니께서 김치 주시면,
"어머니, 저희 많이 안 먹으니 조금만 주시고 어머니네 드세요."
지금 내가 딱 겪고 있으니 이제야 어머니 마음이 상상이 간다.
'에라이~~ 많이 달라고 해야지. 에미는 없으면 또 사 먹으면 돼'
난 늘 어머니께서 드실 것을 나눠주시는 게 죄송스러웠다. 그냥 주시는 대로 받고 다르게 잘해드릴걸. 어머니께서 퍼주시던 마음은 기쁨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반성한다.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에미 마음이다. 난 또 해 먹으면 된다.
직장 생활에 잘 먹고 다녀야지. 반찬 잘해 먹고 산다지만, 둘이 소꿉놀이 하는 듯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올라오니 웃음만 나온다.
나도 그랬으니까, 다 겪었으니까 안다.
김장김치 몇 포기와 쪽파김치, 내가 한 무생채와 5시간 불리고 한 시간 조린 콩장을 밑반찬으로 싸서 아들 손에 들려 보냈다. 이것저것 싸 보내니 진짜 엄마 노릇한 것 같아 뿌듯하고 흐뭇했다.
'이런 맛이군! 며느리 들인 시엄마 노릇 하는 게...'
아들이 갑자기 왔지만, 아빠가 준비한 고기볶음과 김장 김치랑 아침 먹이고, 간식도 먹이고, 커피도 대령했다. 푸짐하게 어제 만들어놓은 뼈다귀 묵은지찜을 바글바글 끓여 저녁까지 먹여 보냈다.
아주 오랜만에 네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행복했다. 여기에 이쁜 며느라기 하나 붙으면 더 즐거울 것 같다.
김치통에 냄새 안 나게 이것저것 싸 넣어 초보 주부처럼 보내긴 했지만 매우 흐뭇했다.
아들을 보내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내 마음은 이미 다음 해 김장철로 달린다.
난 많이 부족한 며느리였다. 그래서 우리 며느리는 좀 편할 것 같다. 며느라기도 시엄니인 나와 함께 밀키트 주부 하면 된다. 만사 오케이다. 옛 세대와는 다르니까.
아들 오면 소소한 돈이라도 아껴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필요한 거 있으면 다 가져가라 하니 자기 집에도 다 풍족하단다. 엄마 쓰고 엄마 드시란다.
"이제 네 돌 금 팔지도 주마." 하니
"엄마 거니까 다 가져요." 한다.
'아니 금딱지를 내가 가지고 가나. 팔아 여행 가라고? ㅎㅎ'
옛것은 다 엄마 거라네. 욕심이 없는 건지, 구닥다리라 거부하는 건지... 그건 아니고 분리다. 엄마건 엄마가 다 쓰세요. 저흰 알아서 살게요.
내가 자립심 하나는 최고로 키워놓았다.
내가 보내는 마음 이상, 아들도 떠날 때 확실한 듯하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 세대에 꼭 붙어살았다. 지금 아들 세대는 분리가 철저하다. 변해가는 문화일 수도 있고, 본래부터 당연한 순리일 수도 있다.
'시' 자 싫어 버리는 새댁도 많다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었는데, 아들 부부가 내가 보낸 반찬 버리지 않고 맛있게 먹어주면 땡큐다.
시엄니가 되니 시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며느리이기만 했던 때는 몰랐던 마음, 챙겨드리지 못해 자리한 빈 마음이 초보 시엄니가 되니 부끄럽고 죄송하기만 하다.
사람은 어느 입장이든 그 입장이 되어야 그 입장을 이해하는 게야.
미리미리 '역지사지'하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