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삶을 위한 시간의 단상
살다 보니 삶이 다더라.
순간의 삶이 모여 나라는 인간의 길고 긴 삶이 된다.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잘 살았다, 못 살았다 질을 따지게 된다.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행복이겠지. 그러나 불행이 있기에 행복도 있는 법. 불행이 있어야 고통도 아픔도 슬픔도 외로움도 두려움도 느끼고, 그래야 하나님을 찾는 고독의 시간도 갖게 된다. 그래서 신은 선물처럼 탄생으로 삶을 주셨고 삶 덩어리인 사람에게 고난의 불행도 심어주셨나 보다.
우리는 태어난 김에, 평탄한 삶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따지며 좀 더 즐겁게, 좀 더 자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외로운 감정을 장착한 동물이 사람인 것을 어쩌랴. 그뿐인가, 불완전한 정신, 부러지고 깨지고, 터지고 할 불완전한 육체를 가졌다. 감정의 고갈과 피폐, 지체의 상실 등으로 삶의 질이 떨어짐은 누구나가 경험해 보는 사실일 것이다.
족부 3종 질환으로 울면서 걸어야 할 때 삶의 질을 따지는 것조차 사치라 느꼈다. 손목이 부러졌을 때도 삶의 질이 떨어졌다.
육체의 건강은 삶의 질을 유지해 주는 기본이 된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는 통정의 시기에 육체의 건강을 잃어보니 삶의 질을 따지게 된다.
때론 정신적 괴로움은 건강한 육체로 커버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이 건강치 못한 나는 정신으로 인해 육체도 건강하지 못해 골골댔다.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젊은 날, 내 삶의 질은 형편없었다. 수우미양가의 평가 척도에 따른다면 '양'쯤 될 것이다.
정신의 건강 중 생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불안이었다. 불안한 나는 톱니바퀴처럼 물려있는 하나의 가치. '시간'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삶의 질을 떨어뜨려 불행하게 한 하나가 바로 시간에 쫓겨 사는 삶이었다. 돌아보는 삶 속에서 가장 후회되고 안타깝게 하는 일이 아팠던 일보다 시간에 쫓겨 살았다는 점이다.
퇴직 전까지 늘 시간에 쫓겨 살았다.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늘 불안했다는 뜻이다.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은 부족했다. ㅡ실상 부족했던 것일까? ㅡ 시간 안에 해내지 못할까를 늘 염려하는 내 삶은 쫓기며 사는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
분명 우리는 삶의 주체이다. 나란 인간 이외의 유무형의 모든 것은 부속물이다. 시간은 우리의 편리를 위해 창조되었을 뿐이지 시간이 주인은 아니다.
난 시간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했고 질질 끌려다녔다.
시간의 주인이 되어 부리듯 써야 하며 귀하게 쓰고 함부로 쓸 것을 결정하는 주체도 바로 나 자신인 것을 몰랐다.
'네가 달아나? 나를 두고? 어림없지.' 하며 시간을 꽉 붙들어 사용해야 한다.
시간은 흐르며 달아나지만, 우리 정신의 힘을 당할 수는 없다. 집중과 몰입으로 묶어둘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종으로 부리며 해내도록 해야 한다. 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한다.
'집중과 몰입은 시간을 부리는 최고의 기술이다.'
여기서의 집중과 몰입은 긴 시간 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몇 초 동안 시선이 머무는 곳에도 집중과 몰입을 하라는 말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잡으라는 뜻이리라.
'시간에 쫓기는 자가 되지 말고 시간을 부리는 자가 되자.'
먼 훗날 '나는 시간에 쫓기며 살았구나!' 하는 한탄의 소리를 하지 말라고 지금을 사는 인생 후배들에게 내가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나 소망은 빛나는 젊은 날, 시간에 쫓겨 늘 불안하게 살았다. 여가에 여행을 가도, 놀고 있는 시간에도 할 일을 생각하며 늘 불안했다. 시간이 유용한 도구임을 알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질질 끌려다니며 에너지를 고갈시켰다.
시간을 제 것으로 만들어 부리는 자, 당신의 삶은 성공 예감이다.
후회도 삶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
지금의 나는 시간을 덩어리로 보지 않고 분절해서 보려 한다. 나의 삶도 순간이니까.
순간의 시간을 사는 것이 삶이다.
분절해 볼뿐 지나온 삶과 현재 삶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삶들이 모여 의미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지나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이 의미로 맥락을 가질 때 삶의 질은 올라간다. 순간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누군가의 손에는 도깨비방망이가 들려져 있다. 그가 '뚝' 하면 월요일이 되고 '딱' 하면 토요일이 된다. 일요일은 누구나 쉬는 안식의 날이다.
시간은 자신을 귀히 쓰는 자를 기다려 주지만, 함부로 쓰는 자를 피해 쏜살같이 달아난다.
by 소망
나의 한 줄 생각은 그리스어에 때를 나타내는 시간의 개념인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의미하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누가 만든 것일까.
수학 시간에 시간은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을 수치화한 것이라고 배웠다.
째깍거리며 시계가 흘려보내는 정량적
시간은 크로노스의 객관적, 물리적 시간을 의미한다.
시를 알기 위해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해시계는 태양의 일주운동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게 만든 장치이다. 중세 기계식 시계는 14c 이후에 나왔고, 초 단위를 측정하는 시계는 16c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전의 시간은 해시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이후에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시계가 만들어진 후 수학 과학의 발달로 수치로 측정되고 수치화되어 기록 저장까지 하니 길고 짧음도 비교할 수 있다. '때'라는 추상적인 것이 구상화되어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했다. 따라서 시간도 인류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탐구하고 사유해야 하는 심오한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고대부터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 주된 관심사였으나 딱히 명확한 개념 정의가 어려운 '시간'인 듯하다.
철학적 관점에서 시간이란, 인간에게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은 결국 마음과 기억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시계가 없을 때는 시간이 없었는가? 시간은 있고 없는 게 아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계를 시간과 함께 동시적으로 창조하셨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라는 것은 없고 현재만 있다고 했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과거라는 현재의 기억, 미래라는 현재의 기대와 현재라는 현재의 직관으로 시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시간은 측정하지는 못했지만 태양이 뜨고 지는 흘러가는 하루가 있었고, 계절의 흐름이 있었다. 인류는 누구나 그것으로 시간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어디에?
그렇다. 기억 속에 있다. 남아있는 시간도 있고 사라져 버린 시간도 있다. 길게 남은 기억도 있고 짧은 기억도 있다. 기억에서 시간의 길고 짧음은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주관적, 정성적 개념의 카이로스이다.
수치화되는 일반적 시간은 크로노스, 인간의 의식 속 기억의 때라는 것이 카이로스라 할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은 함부로 쓰는 것이다. 시간은 함부로 쓰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빠르게 달아난 듯 느껴지고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시간을 귀하게 쓰는 사람, 시간을 잊고 할 일에 몰입하는 사람에게는 할 일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 의미는 의식 속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는 듯 그때를 기억, 각인하기 때문이다. 영원이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깊은 몰입을 뜻한다. 의미로 충만할 때 시간은 많은 것을 남긴다.
나도 자주 경험한다. 빈둥댈 때는 1시간이 10분 지난 것 같은데 부지런히 움직여 일을 할 때는 마치 시간이 기다려 준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 시간도 의미를 가질 때 기뻐하는 듯하다.
'20대는 20km로, 30대는 30km로 40대는 40km로, 50대는 50km로 달린다는 말이 있다.'
주변의 70대 언니들은 저마다 그런다.
70을 넘으니 자동차가 달리는 것처럼 시간이 빨리 간다고.
'실제 시간이 나를 태우고 달리는 것도 아닌데 현기증마저 느끼는 이유는 뭘까.'
궁금했었다.
나이가 들어 인지력이 떨어지면 우리 뇌가 인지하는 사물과 현상의 수와 양이 젊은 날보다 현저히 줄기 때문이란다.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때 빨리 가면 사물을 보지 못한다. 천천히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많이 보고 인지하는 젊은 날은 천천히, 나이 들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떨어지는 뇌의 인지력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천천히 흐르던 젊은 시절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못했다. 그리고 그 아까운 숱한 시간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 시간에 쫓기듯 살았다.
시간이 무기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별거 아닌 시간에 쫓겨 도망 다니듯 살았다. 나는 말이야... 그 시절이 무지 아깝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으련다. 돌아보지 말자.
앞으로 남은 시간을 내 의지대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워가면 된다.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나의 의지이며 선택이다.
지금 순간을 의미 있게 사는 일이야말로 시간을 부리며 사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밤이 되어도 태양은 진 것이 아니다. 하루 이틀, 숫자인 날짜가 바뀌는 것은 인류가 만든 룰일 뿐이다.
지구가 움직이지만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순간에 의미를 채우며 살면 되는 것이다.
내일 당장 죽음이 온다면 오늘 꼭 해야 할 일도 없다. 시간에 쫓기는 삶은 불안의 삶이다.
세상 우주의 중심은 나 자신이다. 세상은 나로 인해 존재하고 굴러가는 것이다. 주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