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하고 당당한 마중물
내가 어릴 때는 물 한 바가지를 붓고 물을 퍼올리던 작두 펌프라는 것이 있었다. 물 나오는 통로가 꼭 짧은 코끼리 코같이 생겼다.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지하수를 마중하러 먼저 보내는 물인 셈이다.
옛 기억을 떠올려보면, 마중물이 충분할 때는 힘을 적게 들이고 물을 퍼올릴 수 있지만, 물을 찔끔찔끔 붓거나 양이 적으면 힘은 힘대로 들고 퍼 올리는데 시간은 시간대로 소모되었다.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작두 펌프와 지하수를 마중하는 마중물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네 모습과의 닮음.
은행에서 긴긴 외환업무를 보았다. 과장직인 창구의 직원은 처음 나를 대할 때 웃으며 "안녕하세요?" 했다. 곧 시작된 Q&A에서 웃음과 상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점차 표정이 굳어갔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감정변화를 느끼며 불편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달러의 환율, 예적금 시 대체와 현금의 차이, 수수료 발생의 경우, 원화 환전에 따른 손실 등. 내 전문이 아닌 그녀의 전문이라 생각하며 궁금했던 사항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물었다.
"분명 12개월 적금을 부어 끝이 났는데, 13월분이 적립된 것도 이상해요."
외화 적금 시 자유적립에 처음 가입일은 20일이고 자동 이체일이 30일인 경우 막달에 2번 빠져나간단다. 우리네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데 외화는 그렇다니 믿을 수밖에. 새롭게 알게 된 정보다. 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설명하면 알까? 꽤 나이가 있는 아줌만데...' 하는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설명해 나갔다.
불편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재차 확인하며 질문했고 시간은 걸렸지만 그녀의 설명을 반복 정리하며 이해하게 되자, 직원의 얼굴 미간이 펴져갔다.
처음에는 못 알아들으니 답답해 짜증 섞인 표정과 어투가 분명했는데 그에서 벗어나,
"궁금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하면서 자신의 경우를 빗대어 부연 설명까지 해 주었다.
창구의 대기번호가 20 이상 넘는 긴 시간을 지나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예전의 나는 스스로 잘 모르니 위축된 가운데 금융 전문가 앞에서 쫄아 업무를 보았다. 이해 못 해도 그냥 '예~ 예~' 하면서 처분대로 해결하고 왔었다. 내 의지보다 전문가인 권유자의 뜻을 따랐다가 천만 원 이상 손해를 본 적도 있다. 여튼 그도 나의 선택이고 내 책임이니 감수할 일이다. 전문가도 조언자일 뿐 선택은 내 몫이니 말이다. '모르는 게 자랑은 아니지' 라며 부끄러워했다.
은행을 나와 또 다른 은행 업무를 위해 버스를 탔다. 생각 속에 빠졌다.
은행에서 고객은 나이니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직원의 눈치를 봤다.
그들이 전문가라는 생각에 쫄았던 나 자신이 찔끔찔끔 부어대어 지하수를 확 끌어올리지 못하는 마중물 같았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부끄러워 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전문적 지식 서비스를 제공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의 회사가 그에게 페이를 지급하는 대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늘 위축된 내 모습은 아마도 나 자신의 濕일 것이다.
확실한 목표 달성을 위해 나 스스로 여유 있고 당당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마중물이 찔끔거리면 지하수도 찔끔거린다.
은행 직원의 태도도 고객의 태도에 따라 오락가락할 것 같았다. 당당하게 충분한 양의 물을 확 붓고 힘 한번 확 쓰면 지하수가 팍 하고 터져 오르는데 말이다. 모든 것은 고객인 나의 태도가 부족하니 고객으로서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듯하고 넉넉하게 부어지는 마중물처럼 고객은 정중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넉넉한 마중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잠깐의 빡센 힘만 들이면 지하수가 쉽게 올라온다. 당당한 포지션으로 정확한 워딩, 여유 있는 접근 등은 일을 쉽게 풀어가고 상대에게도 어떠한 대응이 필요한지를 신속하게 인지하여 적절한 처신을 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무에는 똑똑한 전문가이다.
갑과 을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고객과 직원은 갑과 을의 관계일 수 있으니 분명 고객인 내가 갑이다.
근데 창구에 가면 전문가와 일반인이라는 위치에서 갑과 을의 자리가 뒤집힌다.
그러면 지하수는 갑이 된다. '마중물인 네가 먼저 수고해. 그러면 지하수인 내가 올라가 줄게.' 딱 고 상태다. 하는 거 봐서 대우하고 피드백 봐서 설명도 더 해줄게. 은행직원들의 태도를 뭐라 하는 게 아니고 고객인 내 마음 자세가 문제임을 돌아보는 것이다.
펌프질로 힘들이는 것은 소통의 분위기이다.
갑질 아닌, 갑의 위치에서 여유 있고 넉넉한 태도,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 일관성 있게 상냥한 어투로 계속 말하다 보니 직원도 친절해지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충분한 마중물이 되었다. 찡그린 표정은 잠깐, 친절 모드로 변했다는 것이 내게는 고무적이었다.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던 금융권에서의 업무를 보면서 달라지는 나를 발견했다.
금융 전문가가 아닌, 특히 외환 관련은 창구 직원들도 몰라 답을 못하고 애먹는 경우가 있다. 어찌 일반인인 내가 알랴. 그저 모르는 게 잘못인 양 쫄았던 건 내 감정의 문제였다.
갑질이 아닌 당당함은 전문가 앞에서 알아야 할 권리를 취하는 것이었다.
찔끔인 마중물은 당당치 못한 태도이다. 계속되는 펌프질로도 올라오지 않는 상태는 갑과 을이 전도되는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은행 창구에서의 분위기를 작두 펌프와 마중물에 대입해 보니 나름 재밌었다.
지하수를 쉽게 끌어올리려면 마중물을 한 번에 충분히 부어주면 된다. 찔끔거려 작두 펌프까지 욕 먹일 필요가 있는가. 작두 펌프는 기능상 아무 하자가 없다. 일을 쉽게 끝내려면 하드웨어인 나와 상관없이 소프트웨어인 태도, 감정, 여유, 마음 등이 잘해줘야 한다.
이 아줌마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쩔쩔매며 살았던 거야? 그도 결핍에서 온 피해의식 때문이었나 싶다.
저 그렇게 쫄며 쩔쩔매며 살았네요. 외부에서 보이는 내 모습이 아닌 진짜 속 모습요. 저만 알잖아요~~.
마음 챙기고 하나님 그늘에서 사니 이 작은 것들도 다 변하네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 존중한다는 것. 사랑하는 것이 이제야 되네요.
생활 곳곳에서 달라진 제 모습을 보게 되거든요. 기적처럼요.
타인에게 정중하나 나 스스로 당당할 때 자존감도 지켜집니다.
by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