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육아하면 부부 사이가 더 평화로울 거라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마냥 싸우며 지내는 건 아니다. 싸울 일이 많아진 만큼 못 싸울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1. 일단은 싸울 시간이 없다.
이건 사실 남편이 육아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겪는 상황이다. 부부가 싸우든 말든 아이는 응가를 하고, 둘의 의견 대립이 얼마나 심하든 저녁 시간이 되면 일단 아이를 재우자는 강력한 공동의 목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 둘 중 한 명은 고스란히 육아에 바쳐지고 있고 갈아 넣고 있으니 싸움을 걸 수도, 걸려온 싸움에 대꾸할 수도 없다.
한 눈 팔면 어느새 책상 위에 올라가 있다던지...
2. 서로 해야 할 말이 너무 많다.
냉전을 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 부부는 원래 갈등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직접 부딪히기보다는 서로 냉담한 시간을 좀 보내면서 그 사이 생각을 좀 정리하고 대화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함께 육아를 하면서 아이 때문에 연락할 일이 많으니 서로 냉전 기간을 가지기 어렵다.
"하원할 때 그 서류 꼭 사인해야 해"
"차는 자리가 없어서 다른 곳에 대놨어"
(나와 남편은 차 한 대를 나눠 쓰고 있다.)
"딸내미 오늘은 치과 가야 돼"
아이 때문에 이런 연락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다 보니 서로 냉담하기가 어렵다.
특히,
"딸내미 오늘 오후에 뽀로로 까까 사주기로 약속했어"
"딸내미 요새 응가 못해서 유산균 까먹지 말고 꼭 먹여야 돼"
이런 단어를 쓰며 하루에 5-6번씩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냉담한 척하려면, 갑자기 내가 너무 유치하게 느껴져 웃음이 풋 하고 나와버린다.
3. 정신도 없다.
간신히 냉전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집에 오면 일단 아이 때문에 싸울 정신이 없다. 말 한마디 할라치면 자기 안 본다고 '엄마 여기 봐', '아빠 이거 해 봐', 엄마 아빠 대화가 조금 싸하다 싶으면 눈치 살살 보면서 자기 까까를 먹여주거나 장난감을 가져다주니까 싸울 새가 없다. 아이 눈치 보며 장단 맞춰 정신없이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다 보면 뭐 때문에 싸웠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런저런 얘기를 꼭 해야지 생각했던 건 죄다 까먹고, 다시 기억해보려다가도 아이가 부르면 '아이고 정신도 없는데, 까먹은 거면 중요한 것도 아니었을 거야.' 하고 지나가고 만다.
음식하고 있는데 언제 비닐장갑끼고 턱받이하고 키친헬퍼(=발 받침대) 들이밀며 온다던지...
4. 그러고 나면 다시 1번으로 돌아간다.
싸울 시간이 없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얘기해야지 하는데 아이를 재우며 잠들어 버린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고 나면 이제는 싸운 이유조차 가물가물하고 싸웠던가 싶을 때도 있다.
이러니...
그러다 보니 서로 부딪히거나 틱틱거릴 일은 많아졌는데 싸움이 되지를 않는다. 나름 열심히 부딪히고 냉전기간도 갖지만, 싸우든 안 싸우든 수시로 연락하고 뽀로로니 까까니 응가니 얘기하고 있는 우리 부부를 옆에서 본다면 싸운 상태인지도 모를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갈등이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응어리가 쌓이기는 하는데 그건 또 정기적으로 부부간의 시간을 가지며 풀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또 다른 글 '우리에겐 회식이 필요하다'로 이어진다.)
밉고 보기 싫은 때에도 여유가 나면 남편과 시간을 갖는다. 이런 나를 보며 친정 엄마는 그렇게 싸우면서도 시간만 나면 남편한테 쪼르르 가냐고 웃지만 그게 아니다. 이건 숙제 같은 거다. ㅋㅋㅋ
함께 육아를 하며 싸울 일도 많아졌지만 못 싸울 일도 많아졌고, 그래서 안 싸우는 듯 하지만 은근히 쌓여서 풀어주는 시간을 숙제처럼 중간중간 가지며 지내고 있다. 부부만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하는 건 항상 나다. 그래서 늘 남편에게 우리가 잘 지내는 건 내 덕이라며 농담하지만, 사실 이 시스템이 가능한 건 남편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 덕임을 알고 있다. 그 덕에 이성을 놓을 만큼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 잘하고 있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