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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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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Feb 15. 2024

폭진눈깨비

미국생활 178일 차



며칠 전부터 뉴욕에 드디어 눈 다운 눈이 온다고 난리였다. 뉴욕은 매해 겨울 눈이 많이 오는 걸로 유명했는데, 지난겨울에 이어 이번 겨울에도 눈이 안 오고 있다. 뉴요커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눈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 뉴요커들은 다들 이번 겨울 내내 눈을 기다렸다. 이번에 눈이 최대 8인치 온다고 했을 때는 폭우 예보 때와는 달리 다들 설레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옆 건물 담장과 2.5미터쯤 떨어진 우리 집 창문으로도 뭐가 엄청 내리는 게 보였다. 설레어하며 열어보니... 이건 진눈깨비였다. ㅋㅋ 뭐가 많이 내리긴 내리는데 온도가 영상에 가까워서 진눈깨비가 왔다. 진눈깨비라도 워낙 많이 오니 쌓이긴 쌓였는데 우리가 기대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잘보면 바닥이 진창이었다


나는 수업은 없었지만 과제 때문에 도서관에 다녀왔는데, 우리 집은 도서관에서 딱 5분 거린데도 불구하고 패딩이 홀딱 젖어 버렸다. 많은 수업이 원격으로 전환돼서 학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는 눈 치우는 기계와 사람들이 있어서 길은 계속 걸을만한 상태였지만, 한 치 앞도 잘 안 보여서 애초에 사람이 다닐 수도 없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이 상태의 길을 유지한다는게 놀라웠다


눈 때문에 딸내미 학교는 원격수업을 했다. 전날 저녁에 공지가 왔는데, 얼마 전까지 맞벌이 부모였던 입장에서 아찔했다. 여긴 오픈 클래스도 그렇고 공지가 항상 늦는데, 이렇게 다들 어떻게든 맞춰 내는 건 우리 보다 회사들이 훨씬 유연하기 때문인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하는 부모들은 힘들긴 했을 거고 주양육자인 남편도 고생을 했지만, 사실 나는 딸내미가 수업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좀 좋았다.


처음에는 컴퓨터로 자기가 뭔가 한단 사실에 마냥 들떠 했다.


4살 아이들과 수업을 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선생님들이 애를 많이 써서 애들이 조금은 참여를 했다. 딸내미는 음악이랑 실내 운동 시간에는 별로 집중하지 않더니, 담임 선생님이 하는 수학 시간에는 엄청 집중한 모습을 보였다. 음소거 모드를 하다가 발언 기회를 줄 때마다 음소거를 해제해 줬는데, 딸내미가 하도 계속 얘기해서 사운드가 겹치니 선생님이 나중엔 딸내미를 음소거시켰다 ㅋㅋ (그 후로 다른 아이들도 음소거를 하긴 했지만, 딸내미가 거의 일 순위였다. ㅋㅋ 선생님도 시스템의 한계를 느꼈는지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얘기하도록 시켰다.) 선생님이 딸내미가 학교에서 진짜 말이 많고 수업 때도 손을 든다고 하길래, 주로 잡담을 많이 하고 수업시간에는 이제 참여를 시작한 정도인 줄 알았는데 완전 열성 발표자였다. ㅋㅋ


원격 수업을 한다고 해도 30분씩 3번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딸내미는 재활용품으로 작품도 만들고, 찰흙을 물에 녹여 약도 만들고, 엄마가 아빠 머리 잘라주는 거 구경도 하고 재밌게 놀았다. 엄마 아빠와 같이 오래 있으니 신나는 모양이었다. 딸내미가 좋아하는 가라테 수업도 갔다. 남편이 혼자 데리고 갔는데, 그 시점에서 진눈깨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길이 엉망이라 딸내미 외에는 한 명밖에 안 왔다고 했다. 완전 과외가 돼서 딸내미가 엄청 재밌게 놀았단다. 심지어 둘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내일 밸런타인을 기념해 나한테 줄 장미까지 사 왔다. 이 진창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어떻게 (평소에도 잘 안 하던 ㅎㅎ) 이런 생각을 다 했나 모르겠다. 남편의 육아력에 경의를 표한다.


기대도 안해서,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데도 한참을 못 봤다.


진눈깨비가 그치고 학교에는 거대한 눈사람들이 엄청 많이 생겼다. 소셜미디어에도 다들 눈 온다고 난리였다. 애초에 눈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눈이 아닌 진눈깨비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눈 때문에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다른 사람들의 설렘을 함께 느끼면서 은근 포근한 하루를 보냈다. 주양육자로 육아하느라 고생하고 내일 밸런타인데이 꽃까지 챙겨야 했던 남편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랬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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