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 거리는 고작 0.01cm에 불과했다. 그리고 6시간 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이 대사는 영화 중경삼림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전환점이다. 나는 이 짧은 장면이 유독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아마도,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해서일 것이다.
가끔은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사랑들을, 얼마나 많은 기회를 우리가 놓쳐왔는지. 첫사랑을 운명이라고 믿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늘 내 곁에 있었으니까. 학교 복도에서, 교실 창문 너머에서, 그리고 늘 내 하루 어딘가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채, 결국 지나가버린 순간들.
얼마 전,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사진 속 나는 어딘가 멍하니 서 있었고, 그 뒤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기억의 저편에 있던 하나의 단서가 되살아났다. 뉴질랜드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도 그녀였다. 모든 게 그렇게 가까웠다. 생각해 보면, 내 삶 속 그녀의 존재는 항상 0.01cm 거리에서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붙잡았다. 가까이 있었기에,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운명을 이야기하며 설레곤 한다. 운명이란 말은 무겁지만 동시에 가볍다. 삶에서 몇 번이나 운명 같은 순간을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기적처럼 적은 횟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운명 같은 순간들이 때론 지옥 같은 순간들을 버티게 해 준다.
그녀와의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운명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거리도 멀어지고, 마음도 멀어졌다. 남겨진 건 하나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된다.
사실 요즘은 더 이상 그런 운명 같은 순간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느끼고도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각이 무뎌진 건지, 아니면 운명 앞에서 초연해진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단 하나 분명한 건, 운명은 붙잡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첫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만약 그때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지금쯤 그 기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간 사랑들, 놓친 기회들, 스쳐간 사람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합쳐 하나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어쩌면, 운명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선택이고, 행동이고, 기억일 뿐이니까.
이제 나는 어떤 사랑도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단어는 처음엔 아름답지만 끝에는 늘 뒷맛을 남긴다. 지나치게 영화적이고, 지나치게 환상적이다. 다만 나는 내가 지나온 순간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비록 그것들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내 삶의 일부로 남아 있으니까.
운명은 내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착각이었다. 하지만 그 착각이 있었기에 지독히 고통스러운 순간들마저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착각을 좇지 않는다. 이제는 그냥 흐르는 대로 두기로 했다. 그래도 가끔, 정말 가끔, 아주 가까이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갈 때면 그날의 0.01cm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운명이란 어쩌면, 이런 거였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