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나는 사소한 물건의 유통기한을 하나씩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냉장고 문을 열고 꽁치캔을 꺼낼 때도, 오래된 잼병을 들여다볼 때도, 마트에서 고기를 살 때도. 그 작은 숫자들—2024.11.01, 2025.03.15—그것들은 마치 그 물건이 나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나의 시간은 여기까지야. 그다음엔 나를 버려야 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통기한이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꽁치도, 미트볼도, 심지어 플라스틱 랩조차도 유통기한이 있는데, 정말 어떤 것에도 유통기한이 없는 걸까?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한계가 있고, 결국 언젠가는 버려질 운명이다.
영화 중경삼림의 그 장면을 떠올린 건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금성무가 텅 빈 눈으로 파인애플캔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유통기한이 없는 건 세상에 없지.” 그 말이 그렇게 날카롭게 내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내가 그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단지 허무하게 들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랑도, 관계도, 사람도 결국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마치 사랑이나 인연이 캔 속의 파인애플처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 순간이 지나면 사랑은 부패하고, 냄새가 나고, 결국엔 버려질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도 모르게 속으로 금성무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맞아, 유통기한이 없는 건 없지.”
그것은 받아들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변명이었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나는 종종 사랑을 다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았다. 어차피 끝날 것을 왜 붙들고, 왜 애쓰고, 왜 더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핑계였다. 나는 유통기한의 존재를 핑계 삼아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끝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그렇게 허무하기만 한 걸까?
유통기한은 어쩌면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기간’을 소중히 여기게 만드는 일종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썩기 전에 먹어야 할 파인애플처럼, 끝나기 전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할 사랑처럼. 유통기한을 아는 사람만이 그것이 다하기 전에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도 무언가 끝이 보이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한다. 나는 이제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끝을 아는 만큼 더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 안에 남은 열정이 바닥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파인애플 캔에도, 미트볼에도, 우리의 시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유통기한 때문에 우리는 순간을 더 깊이, 더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끝을 위해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나는 아직 그게 쉽지 않다. 어쩌면 아직도 사랑의 유통기한을 핑계 삼아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그 유통기한이 다가왔을 때 후회 없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금성무가 그 파인애플캔을 먹으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했던 말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유통기한이 없는 건 세상에 없지.”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또 한 번 마음속에서 되뇌어본다.
“그래, 유통기한이 없는 건 없으니까, 오늘 더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