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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바다

최유리

by someformoflove

한겨울의 바다는 칼처럼 차가웠다. 준은 담요를 어깨에 걸친 채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고요한 물결이 어둠 속에서 미약한 달빛을 반사하며 조용히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의 리듬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면서도 이상하게 위로했다.


“춥지 않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준은 고개를 돌렸다. 유진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플러를 조이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오랜만에 바다 보러 오니까 춥다는 생각도 잘 안 들어.” 준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


그들이 함께 바다를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애 초반, 둘은 종종 밤바다를 보러 오곤 했다. 준은 그 시간이 그저 좋았고, 유진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일상에 치이며 그런 순간은 점점 사라졌다. 오늘은 그런 유진의 제안으로 나선 자리였다. 준은 그저 바람을 쐬러 온 줄 알았는데, 유진은 이미 그날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 많이 난다.” 유진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

“어떤 거?”

“그냥… 네가 여기서 한숨 쉬던 거, 나도 옆에서 따라 쉬던 거. 그땐 참 웃겼는데.”

준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기억이 떠올랐다. 답답한 하루를 견디다 못해 유진을 끌고 와선 바다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날려버리고 싶다”는 핑계였다. 그럼에도 유진은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다.


유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난 네가 부러웠어.”

“왜?”

“난 한숨도 크게 못 쉬었거든.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도 몰랐고.”

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 유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고마웠어. 그때 네가 말없이 옆에 있어 줘서. 날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유진은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난 네가 내 바다였던 것 같아.”

준의 마음은 묵직해졌다. 그는 유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불현듯 자신이 잊고 있던 감정을 깨달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그가 아프고, 지치고, 무너질 때도 유진은 조용히 그를 감쌌다. 하지만 준은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위로를 주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유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나도 고마웠어.” 준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 줘서. 그리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널 더 안아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미안해.”

유진은 놀란 듯 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넌 충분히 나한테 많은 걸 줬어.”


준은 바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유진의 말은 준이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이 순간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우리 이제 다시 자주 올까? 여기.” 준이 물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엔 내가 널 안아줄게. 네가 무너지지 않게.”


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들의 마음은 서로의 온기로 따스해졌다. 그날 밤, 고요한 바다처럼, 그들의 관계도 다시 조용하고도 단단히 이어졌다.


그날 이후, 준은 유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언제나 그랬듯, 이제는 그가 그녀의 바다가 되어주리라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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