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멈춰 선 계절에 누군가가 와준다면

by someformoflove

처음에는 그랬다.

낯선 길을 걷다 우연히 문득, 누군가의 계절에 발을 디딘 것처럼.

어릴 적의 나는 그렇게 누군가의 풍경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날씨와 온도, 그 사람만의 언어와 습관에 맞춰 몸을 눕혔다.

눈을 뜨면 그 세계의 아침이었고, 눈을 감으면 그 세계의 밤이 찾아왔다.

짙게 피어오르는 향을 따라 걷다가 낯설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그곳의 계절을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는 몰랐다.

바람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일처럼, 그 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을지를.

누군가의 세계는 오래도록 머무를 만한 집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걸.

창문 하나 없는 방처럼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서 숨을 고르고 있으면, 결국 어느 순간 나는 문밖으로 나와 나만의 계절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그저 내 안에 작은 정원을 가꾼다.

이곳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무방비하게 열어줄 만한 공간이 아니다.

한때는 허락도 없이 들여보내주곤 했던 길목에 이제는 낮은 담을 세우고, 덜컹이는 대문 하나쯤 달아둔다.

무심히 피어오른 풀잎의 촉감, 낡아가는 의자의 결, 해를 따라 기울어지는 그림자의 방향까지.

모든 것들은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어느 날, 이 정원에 머물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예전처럼 덜컥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계절의 끝자락을 함께 걸어보자고, 비바람이 잦아든 오후에 잠시 앉아보자고 말할 것이다.

이제는 온도를 맞춰줄 줄 아는 사람인지, 내 향에 흠뻑 젖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서로의 기후를 섞어낼 줄 아는지.

그런 것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쉽게 내어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남의 계절에 파묻혀 살아도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저 잠시 스쳐간 바람 같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향이 내 안에 오래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일인데, 그 바람을 끝까지 붙잡으려 했으니.

억지로 틀어쥔 손 안에서 향이 바래는 줄도 모르고, 끝내는 온전히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이제는 안다.

서로의 세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을.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건, 오래 손님처럼 머물다 갈 사람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라

기꺼이 그 세계를 살아낼 사람을 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조금 더 신중해진다.

오늘도 스스로의 정원을 한 번 더 돌아보고, 기울어진 나무를 손질하고, 물기를 머금은 흙을 다져가며

그렇게 나만의 계절을 조금 더 단단히 가꾸어본다.


서로의 바람이 겹쳐질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나 혼자만의 공기에는 없던 새로운 냄새가 스며들었음을.

익숙한 골목을 돌아도 낯선 향이 따라붙고, 혼자서는 듣지 못했던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

아, 또 누군가의 세계가 이 정원에 발을 디뎠구나, 조용히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세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누구의 계절에도 잠시만 머물다 돌아올 준비를 하고,

내 세계의 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그들의 공기를 받아들여

서로의 경계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섞어가 보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오래된 오크통 안에서 숙성된 향처럼,

시간이 깊어질수록 더 진하게 퍼져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

계절과 계절이 만나 새로운 기후가 탄생하는 것처럼,

내 세계와 그 사람의 세계가 섞여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가는 일.


아직은, 이 정원에 혼자 남아 있는 시간이 더 익숙하다.

그러니 오늘도 스스로의 계절을 돌본다.

바람이 지나가고, 해가 기울고, 그늘이 만들어지고,

언젠가 올 사람을 위해 조용히 문 하나쯤은 열어둔 채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의 이야기, 그리고 남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