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장면
나는 한 시간 일찍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8번 출구에서 연남동 경의선 숲길로 천천히 걸어가 벤치에 자리를 잡아 책을 꺼냈다. 전날 친구에게 받은 소설 작법서였다. 가만히 책을 읽기 시작하자 이내 거리가 고요해졌다. 나 역시 입을 다문 채 문장에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고개를 들자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여자 무리가 내 앞을 지나쳤다. 시계를 확인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8번 출구로 돌아와 카페 앞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P가 자기도 1번 출구라 대답했다. 나는 한 번 더 8번 출구 앞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P는 어째서 거기 있느냐고 되물었다. 아차 싶어 스크롤을 올렸다. 지난날 P가 오늘 일정이라며 잔뜩 적어놓은 문자에는 ”1번 출구“라 쓰여있었다. 그 아래엔 문자를 읽지도 않은 채 “수신 양호”라 적은 나의 답장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1번 출구로 향했다.
1번 출구에 도착했을 땐 약속했던 3시 30분이 조금 지나있었고, P는 차도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얼마 안 돼서 D와 D의 애인인 그녀도 멀찍이 나타났다.
우리는 P가 이끄는 대로 민물장어 집에 갔다. 동그란 테이블에 P는 두 연인을 마주 보고 앉았고, 나는 P의 곁도 아니고, 연인 곁도 아닌 중간에 앉았다. P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시키고, 얼른 들이키며 오직 D와 나만이 알아들을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던져놓는 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 옆에서 D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둘을 바라보며 공연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쩐지 둘의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D가 매번 소개해주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P의 말이 멈춘 틈을 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어가 익기도 전에 소주를 섞은 맥주잔을 연거푸 해치운 P는 다시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D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공연히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D에게 그려준 그림 잘 봤습니다. 대학에선 정확히 무엇을 배우시나요. 그럼 이젠 졸업작품 같은 것도 준비하시겠습니다. 그녀가 조금씩 말문을 열 때쯤, 조심스레 나이를 물었는데 97년생이라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P는 자기 여동생도 97이라고 말했다.
아니다. 빠른 년생이니까 96이다. P는 덧붙여 말했다. 이어서, 원래 셋이 보기로 했는데 셋이 보면 D가 자꾸 일하듯 여자친구 전화를 받으러 가길래 이렇게 부른 겁니다, 하고 말했다. 지혜롭지도 못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못한 그의 언사는 솔직함이라기보단 무례함에 가까웠다.
D가 자꾸 늦고 잘못해서 그렇죠? 나는 어떻게든 포장해보려 횡설수설 설명을 덧붙였다. D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도 그랬어요. 들려야 할 곳도 있고, 먼저 만나서 같이 인사드리자고 약속했는데 또 늦어선…….
그녀의 무심한 듯 차가운 표정은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터져 나올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힘을 약간 뺀 채로 절제된 눈동자는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과 무엇이든 일단 억누르려는 이성이 양극에서 갈등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무엇이든 그녀의 말엔 공감하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듣다 보니 진심으로 공감이 되어 더욱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P는 몇 번이고 담배를 태우러 나갔고, D는 한 번 P를 따라 나갔다 돌아와선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이 D랑 어울리나 봐요.
이것만 빼면 정말 좋은데, 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그러자 잠시나마 열기가 올라왔던 그녀의 얼굴은 다시 옅게 식었다. 그리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키가 큰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길고 하얀 원피스에 옅은 회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고, 그녀의 하얀 얼굴은 곡선이 두드러진 것이 고양이상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가끔 D가 사진첩을 열어 그녀의 고양이를 보여주며 제 고양이처럼 신나게 자랑하곤 했다. 얼굴이 동그란 랙돌 고양이었는데, 긴 털은 대체로 하얗고, 이따금 옅은 회색빛을 띠었다. 처음 본 그녀가 그 아이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푸른 잎새를 활짝 피운 가로수가 나른한 저녁 하늘과 어울렸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초저녁의 홍대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앞서 걷는 D와 P와 뒤따르는 나와 그녀 사이를 쉴 새 없이 가로질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개의치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낯을 많이 가린다는 그녀의 고양이와 달리 그녀는 어느새 환하게 웃으며 내게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이 있다면 꼭 이렇게 신이 나서 제 이야기를 들려줄까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며 순덕이 이야기를 했다.
요즘 저는 아이와 대화가 된다고 느껴요. 울 때마다 우는 소리도 조금씩 다르고, 눈빛도 달라요. 그런 걸 보면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계속해서 제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물론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유대감이 느껴집니다. 그런 기분이 저는 정말 좋습니다.
2차로 향한 곳도 역시 P가 아는 곳이었다. 그의 계획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고리타분하게 글을 쓰는 나와 흑인 음악을 하는 D가 상대에게 함부로 딴지를 거는 인물이었다면 쉽게 어울릴 수도 없었으리라. 솔직함을 핑계 삼아 상대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오직 P였다. 그리고 술기운이 오를수록 P의 말버릇은 더욱 심해졌다.
저는 솔직히 여대 다니는 사람 상종 안 해요. 페미니스트들도 진짜 싫어해요.
그녀는 스스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설령 그것이 장난이었다고 하더라고 듣는 이는 물론 보는 이까지 퍽 불쾌하게 만드는 언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술기운이 오를수록 더욱 침착하고, 능글맞아졌다. 나는 굳이 나서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이미 지친 얼굴이었는데, 그럼에도 웃고 장난치며 P와 이야기했다.
그러다 P는 돌연 그녀에게 좋은 여자 좀 소개해 달라고도 말했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P는 예의도, 논리도 완전히 발가벗은 채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약간은 초라해 보이고, 약간은 추해 보이는 P의 말에 그녀는 안 그래도 친구들한테 말해뒀다며 부르겠다고 말했다. 취기가 오를수록 그녀는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을 되찾는 듯 보였다. 그녀는 연락처를 찾는가 싶더니,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창 너머로 바라봤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날은 2차를 끝으로 모두 헤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고, D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였다. 그리고 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된 아쉬움에 미적거리는 P는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D에게 먼저 가보라고 말했고, 이후 P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말했다. 그렇게 모두와 헤어지고 하행선 열차를 타자 비로소 몸의 긴장이 풀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