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호 Oct 05. 2021

XLIX

나의 방은 남향이다



    1.

     일이 끝날 즈음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바쁘냐 묻는 말투에서 대충 그의 뜻을 알 수 있었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인터뷰 스크립트를 준비하고 혹여 시간이나 여력이 남으면 단편 소설을 퇴고할 쓸 계획까지 하고 있었기에 나는 아버지와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최근에 살이 찌기도 했고, 이번 주는 운동할 시간도 없으니 저녁이라도 굶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학역에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함박마을의 러시안 식당을 가자고 했다. ‘거기를 또 가서 저녁을 먹고… 집에 가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니터 속 대본을 빤히 바라보며, 아 하고 멈칫하다 이내 “알겠어요. 역으로 가면 20분쯤 걸려요.”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러시안 야채수프와 양 갈비 스테이크, 만두를 주문했다. 따뜻한 수프는 썰어 넣은 양배추가 부드럽게 씹혔는데,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강한 것이 온기와 식감과 영 안 어울렸다. 아무래도 토마토는 아삭하고 시원한 맛에 먹는 것이 익숙하니 말이다. 거기에 희묽은 요구르트마저 섞으니 상큼한 주스 향과 맛이 되었는데 여전히 국처럼 따뜻한 느낌이 영 낯설었다. 어쨌든 식사라기보단 체험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인지 싫진 않았다. 식당엔 얼핏 한국인처럼 보이는 얼굴의 가족들이 러시아 말을 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들과 외엔 모두 중앙아시아 인물의 손님들뿐이었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무언가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았다. 아버지는 원래 이런 수프는 빵과 함께 먹는 거라며 종업원에게 빵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러자 그녀는 크고 동그란 레표시카를 한 덩이 가져왔다. 나와 아버지는 번갈아 빵을 손수 뜯어가며 수프와 스테이크와 그리고 만두와 먹었다.

     식당을 나와선 러시안 빵집에 가 커다란 치즈 빵을 하나 사고 나왔다. 인천대교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나와 같이 내려 담배를 한 대 태웠다. 나는 그 옆에 서서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쪽 빨아 마셨다. 문득 아버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바쁠 테니 먼저 들어가라 말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고 나는 주뼛주뼛 집에 들어갔다.          



    2.

     금요일은 모든 걸 토해내듯 일을 몰아쳤다. 이르게 끝날 거라 생각했던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5시 30분에 회사에서 나왔다. 원인재역에서 잰걸음으로 부단히 걸어봤지만 이미 열차는 떠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좌담회 장소에 갔을 땐 약속 시간보다 20분이 지나있었고, 나는 언제부터 흘렀는지 알 수 없는 땀을 연신 훔쳤다.

     이제 그만할까요 그럼, 하고 녹음을 멈추며 ‘청년과 문화예술’ 좌담회는 끝이 났다. 그때가 9시가 조금 안 된 저녁이었다. 여유가 있었으면 저녁이라도 먹었을 텐데, 하고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배웅했다. 막차 시간을 확인해보니 5분 후 동인천역 북 광장 도착 예정이었다. 나는 배다리 삼거리 앞에서부터 부리나케 뛰었다. 다행히 버스에 올라타고,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며 창문을 연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우수수 쏟아지고, 이내 거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가 버스를 두드리는 소리가 버스 내부를 가득 채웠고, 이따금 바람이 차체를 마구 흔들었다. 그렇게 모든 걸 토해내듯 비바람이 몰아쳤다.

     흔들리는 영종대교를 건너며 순덕이와 집을 생각했다. 바깥 구경이라도 하라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저 비바람이 모두 쏟아지면 창문 가까이 세워놓은 캣타워가 축축하게 젖을 테고, 방안엔 바람과 천둥이 선명하게 울릴 테니 순덕이는 아주 힘들어할 것이다. 형도 요즘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너도 고생이네. 그러네. 아버지도 그랬을까. 비바람이 몰아쳐서 내 생각이 났을까. 그랬을까?



    3.

     내 방은 남향이다. 앞에 높은 아파트 단지가 있어서 그렇지, 그 아파트 사이사이로 틈틈이 하지만 종일, 태양은 나의 방을 비춘다. 부분적 일조권을 침해받은 거주공간이지만, 어쨌든 나의 2층 방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태양은 기회만 되면 나를 비추려고 안달이다. 여기서 나를 비추고, 아파트가 가리고, 그러면 또 저기서 나를 비추고, 하지만 아파트가 또 가리고. 잊었다 싶으면 저 멀리서 나를 비추고 있다. 땅 밑으로 꺼지기 전까지 태양은 나의 방 이리저리 바라본다. 열렬히 비춰주는 태양도 역시 고맙겠지만, 조급하게 이리저리 살피는 태양의 저 안달난 정성이 나는 참 고맙다.

     어쨌든 나의 방은 남향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창이 활짝 열린 베란다엔 비가 한 방울도 들이치지 않았다. 이렇게 쏟아졌는데, 정류장에서 뛰어오면서 그새 젖은 재킷을 털어내며 나는 의아해했다. 순덕이는 티 없이 하얀 배를 드러내며 나를 반겼다. 어쩌면 나의 생은 남향인가 보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때가 오더라도 나의 태양은 이리저리 나를 살피고, 비 한 방울 속살에 닿지 않게 신경 써주나 보다.

     (다음 화에 계속)




이전 23화 XLVIII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