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클리셰
이런 글도 읽어? 아니 읍. 아니. 왜 읽는 거야? 삼촌은 혀를 내밀며 한 마디 한 마디씩 힘겹게 침을 뱉어내듯 툭툭 던져냈다. 저러다 사소한 딸꾹질이라도 나오는 날엔 꾸역꾸역 참던 술이고 안주며, 낮에 먹은 점심까지 위장에서 뒤섞인 모든 것이 내 방 러그 위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는 맥주캔을 쥔 손을 탁자에 아무렇게나 무겁게 기댄 채 다른 한 손으로 테이블에 던져두었던 어느 문학상 수상작들이 모인 단편집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 손을 들어 올린 꼴은 퍽 위태로워 보였다. 저 400g 남짓한 종이책에 균형을 잃고 뒤로 고꾸라졌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그는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야야 얘 책도 별로 안 읽어. 밑천 다 드러난다. 내가 아무런 대답 없이 위태로운 삼촌의 몸뚱이를 살피고만 있자 아버지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이 형. 또 왜 그래. 야. 너 철학과라면서. 그러면 글에 읍. 또 기이픈, 깊은 뭔가를 담을 거 아냐. 야 철학과는 무슨. 얘 책 좇도 안 읽는다니까. 아니 형, 아이씨. 뭘 많이 읽어도 좋은 게 아니라니까! 자기 걸 해야지. 응? 그 그, 김태원도 음악 배우고 하는 게 아니라고. 낄낄 그것도 맞지. 뭘 또 맞대, 이 형은. 이랬다 저랬다. 야야 그래도 이 새끼는 책을 너무 안 읽어. 낄낄. 야 그러냐 진호야? 네 뭐 그렇죠. 실언보다 구역질을 더 조심하는 형편인 둘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 곳은 없었다. 나는 오직 둘의 행동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혹시라도 맥주캔을 떨어뜨리진 않을까. 그걸 순덕이가 먹으면 어떡하지. 그러다 실수로 순덕이를 밟진 않을까. 저러다 여기서 잠자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던 차에 아버지는 헉헉 입으로 숨을 내쉬며 뻔한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하나도 안 미안해, 큰 애나 작은 애나. 그런데 얘한테는 딱 하나 미안해. 95년에 선거운동한다고 얘 애미 고생시킨 거. 그래서 젖을 못 먹었어 얘가. 젖이 안 나오니까. 다른 건 하나도 안 미안한데 그거 하나 내가 마음에 걸려.
삼촌은 그 시절 유일하게 아버지의 선거 운동을 도와준 사촌 형제였다. 그것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고마움으로 남아있고, 그런 삼촌을 만나는 날이면 선거 운동 이야기가 나오고, 뒤이어서 선거 운동 당시 한 살 배기의 내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항상 의아하다. 내 이야기긴 한데 나는 기억 못 하는 이야기니까 내 이야기라고 하긴 그렇고. 엄밀히 따지면 나를 업고서 창백한 얼굴로 고생한 건 엄마니까 엄마 이야기가 아닌가. 그걸 기억하는 사람 역시 엄마니까 아무래도 그건 엄마에게 미안해야 할 엄마 이야기다. 어째서 그 서러움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미안하지 않은가.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게만 미안한가. 또 내가 기억하는 많은 서러움에 관해선 떳떳하고, 오직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기억만 자신의 죄책감으로 받아들이는가. 나는 그게 의아하다. 하지만 역시 구역질에 집중하다 보면 실언 정도는 할 수 있지 하고 넘어간다. 다만 나는 늦은 밤 찾아온 가족들이 탈 없이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순덕아! 하는 아버지의 외침에도 순덕이는 귀도 꿈쩍 않았다.
얼마 전 일을 하던 중 알람이 울렸다. 브런치 알람이었다. “……님이 내 브런치를 구독합니다.” 그건 아버지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폰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다시금 알람이 울렸다. “……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바로 댓글을 확인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를 차단했다. 그리고 나는 가족 카톡방에서 그를 나무랐다. 마치 어린 아들의 일기장처럼 내 글을 대하는 그에게. 나는 그의 관심이 불쾌했다. 정성스레 쓴 글을 고작 제 아들 일기 정도로 가볍게 취급한다는 것이 먼저 울컥 화가 났고,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본 아비가 되레 아들은 물론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일기의 내용에 대해 나무랐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분이 났다.
너 누나랑은 글 공유하고 그런다며. 문득 삼촌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바로 그 사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이미 삼촌에게 무엇을 부탁한 듯 모른 척했고, 삼촌은 자기에게 맡기라는 식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모진 아들내미 교육은 아비보단 삼촌이 낫지. 암.
순덕아! 아버지는 부엌에서 어슬렁거리는 순덕이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밤 11시였다.
아니요. 그냥 누나가 틈틈이 읽어주는 거죠. 따로 안 보여줘요.
그래? 삼촌은 무언가 이야기할 듯 말 듯 맥주캔을 만지작거렸다.
예 그냥 가끔 읽고 마는 거죠. 나는 괜히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삼촌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순덕아! 저 새끼 왜 오질 않아. 순덕아!
아빠. 나는 손을 들어 아버지에게 그만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안 들리는 거 아니야. 냅둬요. 아빠, 안 들리는 거 아니라고.
아버지와 삼촌은 맥주 한 캔도 다 마시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밖에 나가 집에 돌아가는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올해 추석 명절도 끝이 났다.
어쨌든 누군가를 착하냐 마냐 하는 이야기는 공허하다. 어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용한 것이고 우리는 오직 상대가 미운가 밉지 않은가만 생각하면 된다. 오로지 옳기만 한 기준도 없고, 또 반드시 옳은 사람 역시 없으니. 잣대는 무용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잣대를 들이대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이유는 자신의 모난 감정을 대속(代贖)할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언제나 잘못한 게 아니라 미운 것이다. 그러니 그 감정의 책임은 잣대가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져야 하는 거고.
불을 꺼둔 채 외딴 침대에 홀로 누운 나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무어라 욕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그냥 나는 그대가 밉다. 어린 시절 나를 어린아이 취급한다고 그대가 미운 적 있다. 그런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그대가 밉다. 이런 명절이 싫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