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멀리 있는 주제 '우울'에 대한 보경과의 대화
내가 사전 질문지에 제시한 50여 가지 대화 주제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단어를 고르자면 단연 '우울'일 것이다. 그래서 보경이 주제로 '우울'을 골랐을 때 사실 사뭇 반가웠다. 첫 '우울'에 관한 대화는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
모든 인간은 우울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울을 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보경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겨울의 새벽바람이 되고 싶다던 보경. 그녀의 말엔 유독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녀와의 대화를 들어보자.
왜 이번 포터뷰 주제로 '우울'을 고르셨는지 궁금해요. 소마님의 사진을 보면 새벽에 잠이 깬 느낌이에요. 기분 나쁘게 깬 것이 아니라, 우연찮게 깼는데 그게 새벽이고. 그 새벽의 분위기를 담은 것 같았어요, 소마님 사진이. 제시해 주신 단어들이 여러 개가 있잖아요. 그 단어들 중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단어들의 공통점이 약간 짙은 남색 같은 느낌이었어요. 제가 겨울, 새벽, 우울에 동그라미를 쳤는데 그것들을 다 통틀어서 하자면 '우울'이었던 것 같아요. 되게 우울을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우울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우울도 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럼 보경 씨는 우울을 잘 가지고 계신가요?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요즘 (잠시) 잘 모르겠어요. 새벽에 자주 깨요, 그냥 깨져서요. 깨면 그냥 가만히 있어요. 깨고 '이 시간에 잠을 깼다고?' 이런 생각을 하죠. 제가 친구들에게 정말 자주 하는 마인데, 가는 데에 순서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고요. 그게 지금 당장 이을 때려치우고 갑자기 놀아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맙거나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이라면 지금 다 해야 한다, 는 이야기를 해요. 우리는 집에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우울하고, 슬프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느낌이 더 큰 것 같아요. 새벽에 그런 생각을 해요.
새벽이 생각하기 참 좋은 시간이죠. 또 어떤 생각을 해요? 요즘엔 (잠시) 잘 죽을 생각을 해요.
잘 죽을 생각? 그건 어떤 생각이에요?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지금 제가 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성격 상 이게 버티기 힘든 것 같아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 되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순간을 견디는 것이 쉽지 않은? 그래서 내가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럼에도 살고 싶은 것을 살자. 그래서 내가 나중에 '나 미련 없어'하고 죽을 수 있게. 그런 생각을 해요.
굉장히 성숙한 생각이네요. 그럼 다시 돌아와서, 오늘은 왜 우울을 고르셨어요? '우울'은 무엇인가, 하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죽음에 관해서는 되게 많이 이야기해 본 것 같거든요. 모든 사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제가 공연을 많이 보는데 요즘 공연들의 소재가 삶과 죽음에 대한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주제에 대해 보고 이야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데. '우울'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 어떻게 보면 그건 개인의 영역이라 더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럼 보경 씨는 언제 우울을 느끼세요? '우울이 무엇인가' 하는 건 너무 큰 질문이니까 조금 작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자고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느낄 때, 이지 않을까요?
그럼 보경 씨에게 우울은 사랑과 많이 연관이 되어 있을까요? 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은 친절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모든 것에 대해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 자체로도 나를 보고 소중히 생각하고, 점차 커져 또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쫓기는 상황에 놓였을 때, 지금 너무 조급하고 다급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럴 때 우울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 시기나 순간이 구체적으로 있었어요? 저는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작년 겨울, 이번 연도 초부터 지금까지. 저는 작년 중순까지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느리게 간 적이 없었어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갔거든요. 너무 빨리 갔고, 정말 미친 듯이 바빴어요. 그래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말을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처음 이해한 거예요.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게 이런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왜 지금까지 나는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꼈을까, 고민해 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서 그런가 싶었어요.
작년 말쯤부터는 좋아하지 않지만 해야 하는 것을 하셨던 걸까요? 네, 그렇죠. 또 조금 더 큰 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내 인생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약간 번아웃처럼 온 느낌이에요.
누구에겐 길고 누구에겐 짧을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적지 않은 시간만큼 우울함을 느끼고 계신 것 같은데. 어때요? 사람이 힘들고 우울하면 그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자꾸 잠을 자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로그아웃 해버리는 거죠. 저는 정말 하고 싶은 게 한 3일 정도 자고 일어나서 근처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집에 가서 자는 거예요. 일주일 정도만 딱 그렇게 생활하고 싶다, 는 생각을 해요.
아직 보경 씨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보경 씨가 지금 매우 바쁘게 살고 있다는 건 알 것 같거든요. 지금 삶에서 무언가 바꾸고 싶은 게 있어요? 이게 자칫하면 되게 우울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인데. 저는 지금 무얼 하고 싶거나, 바꾸고 싶다기보단. 그냥 제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바람이 되어 날아가거나,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싶어요. 계속 뭘 하는 삶을 살아왔잖아요. 그러니까 무언가를 바꾸는 것 또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바람이 되어 사라지면 너무 시원하고 자유로울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바람이 되어 사라질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어영부영 꾸역꾸역 살아가는 거죠.
들으며 강하게 든 생각인데요. 바람이 되어 사라지고 싶은 거랑 죽고 싶은 건 다른 것 아니에요? 저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늘 제가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항상 제 말을 듣고 '왜 그렇게 우울한 말을 하냐'라고 할 때마다 저는 꼭 해명을 했거든요. 내가 말하는 건 죽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분을 처음 봤어요. 정말 제가 그 이야기를 하거든요. 죽고 싶은 것과 바람이 되고 싶은 건 다르다고. 바람은 바람이고, 죽음은 죽음이죠. 제가 겨울의 새벽바람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런 바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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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SOMMAR CHO
photographer SOMMAR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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