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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May 29. 2023

개인의 삶, 작은 역사

정선임 ‘요카타’ 서평



 예전에 공부했던 한국사 책을 꺼내봤다. 한능검 준비를 위해 구매했던 최태성 선생님의 7일의 기적이라는 교재다. 본 교재는 기본적인 선행학습이 끝나고 마무리 확인용으로 구매해서 학습해야 하는 책이지만, 대부분 게으른 수험생이 그러하듯, 정말 기적을 믿고 구매했었다.


 당시 컴활 공부와 병행을 하고 있어 결국 한능검 시험은 처참히 망했다. 재응시는 하지 않았지만, 당시 오만했던 모습을 회고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공부의 목적이 아니고 한국사 교재를 보니,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권 책을 읽는 느낌이기도 했다. 방대한 국가의 역사는 여러 책으로 정리되며 시험 혹은 재미를 위해 사람들이 찾아 읽곤 한다.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사까지 기나긴 역사는 수많은 편집 과정을 거쳐 한 권 책으로 만들어진다. 그 중 가장 먼저 편집되고 버려지는 부분은 개인의 삶일 것이다.


 당연한 소리다. 당대를 살았던 모든 개인을 하나하나 다루면 분량도 너무 길어질 뿐 아니라,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사료도 없다, 개인의 삶은 역사 속에서 그렇게 휘발된다.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요카타’는 올해로 100세를 맞이한 한 할머니를 통해 개인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작품이다.


 우리네 삶이 모두 역사적 사료가 될 수도 없고, 그러기 위해 사는 사람도 많이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작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하나의 삶을 조명한다.


진에게는 잊어버렸다고 했지만, 하루가 뜯겨나갈 때마다 나는 소리에 매번 가슴이 철렁했다. p202


 본작 주인공은 ‘서연화’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백세치고 세련된 이름이라 말한다. ‘서연화’를 도와주는 사회복지사 ‘진’은 요즘 유행이라며 벽에 새해 첫날 일력을 걸어주었다.


 하루하루 뜯는 재미가 있는 일력은, 20대 초반인 ‘진’에게는 일종의 유희지만, ‘연화’에게는 과연 유희일까 의심이 된다.


“할머니, 지금까지와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거예요.” p207


 ‘진’은 ‘연화’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글을 깨우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익숙한 말이다. 본작뿐 아니라 여러 매체를 통해서 뒤늦게 글을 배우신 분들께서 증언하셨던 수많은 사례가 있다.


 일반적인 사례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통용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아쉽게도 ‘연화’는 그런 사례에 속하지 않는 편이다. 좋은 점은 있다고 했다. 일력에 적힌 글자나, 오래전부터 알았던 지인들 가게 이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정도다. 


 일력을 뜯는 것조차 가슴이 철렁거리는 ‘연화’에게 새로운 배움은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있다. ‘연화’에게 필요한 것은 그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정리할 시간이다. 


하긴, 젊었을 때도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인 적이 있긴 했던가. p210


 ‘연화’는 회고한다. 인생의 종지부 목전에서, ‘연화’는 이제야 결과를 목도할 수 있었다. ‘연화’는 젊었을 때를 돌아본다. 호적상 1919년 3월 1일에 태어난 ‘연화’는 사실 그 나이보다 어리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언니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고 살아온 ‘연화’는 늘 남의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과 강제로 맺어진 첫 번째 결혼에 자의는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인과 했던 결혼은 애가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편은 바람을 폈고 결국 파탄이 났다.


 ‘연화’는 자신의 인생이 평범했느냐고 자신에게 되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바다는 똑같겠지. 바다는 변하질 않으니까. 그죠?” p213
… “아니야. 많이 변했어.” 
바다는 변함없이 똑같을 거라던 말순의 말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뒤늦은 반박을 하고 보행로를 건넌다. p216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바다마저 변할 정도로, 시간은 흘렀다. ‘연화’는 마치 바다처럼 살아왔다.


 ‘연화’는 진짜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했고,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과, 두 번의 이혼도 겪었다. 그런 파도를 바다처럼 묵묵히 버텨왔기에 바다 또한 변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역을 다듬듯, 내 삶에서 불편한 부분을 걷어내고 보기 좋은 부분만 남도록 다듬어 들려주었다. p218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연화’는 스스로 96세라고 인지한다. 세상이 100세라고 불러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연화’는 정정하지 않는다.


 이런 ‘연화’의 태도는 타협과 포기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런 태도였다면, 진즉 진짜 ‘연화’의 존재도, 96세라는 나이도 잊었을 터다.


어쩌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요카타, 라는 말로 체념하고 요카타, 라는 말로 달래왔는지도 모른다. p222~223


‘연화’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방식이다. 부조리하고, 개인에게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역사 속에서 ‘연화’를 달랬던 것은 고작 ‘요카타’라는 일본어 단어였다. 


https://ja.dict.naver.com/#/entry/jako/d5db342381434d929e463b5882d54321

 우리네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은 오히려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쩐지 그토록 안정감을 갈구하는 것도, 사소한 것에 의지하는 삶은 위태로운 상태가 당연해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도 ‘요카타’ 같은 주문이 필요하다. 앞으로 써내려가야 하는 내용이 많은 우리 스스로 다독이고 달래줄 수 있는 그런 따듯한 주문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사소하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코멘터리 북’


작가 : 정선임

출판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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