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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Influence Sep 26. 2019

슬픈 노래를 불러요 슬픈 노래를

"슬픔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김광석이 좋았다. 그 나이에 뭘 알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김광석 특유의 슬픔이 가득 밴 노래를 즐겨 들었다. 김광석의 곡들은 템포가 빠른 노래도 슬프고, 슬프지 않은 가사의 노래도 슬펐다. 나의 십팔번은 그이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소싯적 취미로 했던 통기타 공연에서도 이 노래는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한 번은 공연에서 같이 기타 치던 친구가 자신의 약혼녀에게 결혼하자고 사랑 노래를 부르며 프러포즈를 한자리에서도, 난 꿋꿋하게 저 노래를 다음 곡으로 아주 슬프게 불렀다. 하모니카까지 구슬프게 불어재끼면서… 지금의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말이다. 사실 저 노래는 아내가 노래를 못하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불러도 된다고 정식으로 허가해준 유일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했지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거리에서’, 슬픈 노래’, ‘서른 즈음에’,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래마다 가사마다 그의 노래는 왠지 모를 묘한 매력이 있다. 억지로 ‘울어라 울어라’ 하는 신파조의 노래가 아니기에 수없이 듣고 있어도 들을 때마다 다른 질감의 슬픔이 몰려온다. 그의 슬픔은 미처 하지 못한 아쉬움, 그러면서도 함께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아쉽고 그립고 슬프지만 그 안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인 그리움을 남겨준 이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 이런 정서의 순환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그의 가사는 나의 기억이 되고, 그의 음성은 나의 감성이 된다. 글과 그림, 그리고 그리움의 어원이 한 뿌리이듯이 그의 노래도 나의 마음을 긁는 하나의 뿌리가 된다. (*글, 그림, 그리움의 어원은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은 왜 슬픈 노래만 좋아하냐고 묻는다. 그렇게 슬픈 노래만 들으면 정말 슬퍼진다고… 훈수도 둔다. 김광석도 슬픔만 불러대다 그렇게 슬프게 가버렸지 않냐고…못할 말도 서슴지 않는다. 기쁨을 불러댄다고 그리 크게 기쁠 일도 없는 세상인데 그런다.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쁨을 자랑하기 바쁘다. 아니 없는 기쁨도 만들어서 자랑한다. 페이스북에 인스타그램에 온통 “난 기뻐요, 난 행복해요, 난 잘났어요”가 수시로 업데이트된다. 기쁨 인플레이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액면에는 개인은 기쁨으로 가득하고, 사회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이토록 기쁨은 과잉생산되고 있지만 사회는 점점 더 슬퍼진다. 그렇게 기쁨을 자랑하는 말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우리에게 슬픔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조금 털어놓기에도 공간과 시간 그리고 들어줄 인간의 부족이다. 어쩌다 적당한 곳을 찾아 부려놓으려 해도 적절한 서사와 감정을 잘 섞어놓지 못하면 꺼내놓은 사실 자체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거짓 기쁨이 만연한 곳에서 어설픈 슬픔의 표출은 곧 약점이 된다. 약점인지 몰랐지만 누군가 그걸 물고 뜯고 있다. 필요한 자와 필요로 하는 자들이 만난 곳에서 슬픔은 더욱더 터부(taboo) 시 된다. 기쁨은 만끽해야 하는 것이고, 슬픔은 쌓아두어야 하는 것인가? 슬픔이 내 속에서 나와 오고 갈 때 그 슬픔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또 다른 감사를 잉태한다. 그때 비로소 슬픔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아픔을 감추려고 허탈이 미소 지을 때, 사랑은 떠났지만 추억이 살아날 때, 어린 아이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볼 때, 노인의 주름 속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 슬픈 노래를 부르자 슬픈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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