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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까만 오른발 Jun 06. 2022

운동 후 내 삶

좋은 건 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운동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철없고 쓸모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후회를 했다. 내 몸뚱이로 하는 짓을 거창하게 부풀리는 글을 다시 읽어보니 알맹이가 없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게 어렵다. 힘들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에세이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 그러나 이 마지막이 제일 어렵다.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 지 모르겠다. 키보드 앞에서 모니터를 세로로 세워놓고 검은 화면 앞에서 한 참을 생각했다. 이 얘기를 해도 될 까. 내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꺼내어 보는 이 힘든 느낌을 써 내려가는 것 또한 나의 이야기이기에 한심한 내 인생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운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지금까지 얘기했다. 그 스트레스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니 너무 많이 다쳤다. 그저 좋아할 뿐이었다. 그리고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이제 더 이상 내 몸은 완전히 건강한 몸이 될 수 없었다. 내 신체 기능의 상실감이 너무 컸다. 처음 겪어본 영구적인 상실감에 충격을 받았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건강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했다. 이후 재활운동을 하면서 헬스 트레이닝을 시작하면서 내 몸에 대해 알아갔다. 재활을 하던 당시에 나는 25살에서 26살로 넘어가고 있었다. 검찰직 공무원 임용 시험을 준비하던 도중에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할 정도로 다쳐버렸다. 모든 리듬이 끊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핑계에 불과하다. 그 때부터 나는 마음 한 편에 실패에 잠식되어 살고 있다. 이후 시험에 꾸준히 응시하였으나 연이어 낙방했다. 패배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후회속에 살고 있다. 다시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를 키워 주신 부모님 앞에서 인간 구실은 해야 하기에 취업을 하고 겨우 내 몫을 해내며 살아가고 있다. 실패를 경험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 년째 마음 한 켠에 미련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안되는 걸 알았으면 빨리 포기해야 했다. 포기할 용기조차 없었다. 끝까지 바라보고 있느라 20대를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허황된 꿈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너무 나만의 틀에 갇힌 생각이다 싶어서 다른 사람의 얘기도 듣고 수많은 응원과 격려도 들었다. 그러나 다시 내 자리에 돌아와 보면 후회와 질투와 시기에 갇혀 다시 실패의 늪에 빠졌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냥 숨만 쉬고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다. 이러한 나의 우울에 운동은 유일한 배출구였다. 힘을 주고 땀을 흘리면서 호흡을 이끌어냈다. 머리가 가벼워지고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이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운동을 하니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 내 머리를 짓누르는 모든 고민과 걱정과 절망보다 100kg, 150kg 정도의 중량을 드는 게 훨씬 가볍고 재밌다. 그렇게 거의 8~9년에 가까운 시간을 꾸준히 운동에 할애한 것은 유일하게 내 스스로 인정할 만한 부분이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하고 지속하면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나만의 변화가 있다.


  하나.  서른살이 넘어서도 자라고 있다. 

드디어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무릎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고나서 체중을 70kg 중반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내 나이대로 접어들면서 신체의 대사활동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반면 운동을 등한시했던 내 친구들은 급격히 살이 찌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한참 확산되었을 때에도 운동을 놓지 않았다. 집에서도 가정용 풀업 바를 설치하고 맨몸운동을 했다. 20kg짜리 케틀벨을 중고로 구매하여 좁은 방에서 앞뒤로 냅다 흔들어 댔다. 그냥 나는 깊은 호흡과 몸이 힘든 게 좋았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는 건강해 보이는 몸과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다. 기존에 입던 옷이 맞지 않아 옷을 새로 사야했다. 그리고 어깨가 공부와 일 때문에 굽어 있던 어깨와 목이 운동을 통해 펴지면서 자세도 교정이 되었다. 키도 약 2cm 가 자랐다. 자세를 교정하면서 잃어버린 키를 찾은 것 같다. 조금씩 내 나름대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을 하고 있다. 원래 나는 내가 너무도 싫었다. 항상 애매한 선택과 노력속에서 중간정도만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운동을 접하고나서 죽을 만큼 노력한 결과는 부수적으로 나도 모르게 따라온다는 이치를 배웠다. 몸이 좋아졌다고 해서 이성에게 매력을 뽐낼 정도까지도 아니다. 그저 내가 나 스스로 보기에 만족하는 정도다. 이 정도만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이 든다. 


외형과 더불어 정신적으로 지구력을 키웠다. 견디고 참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인내 끝에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새로운 결과가 있을 것이라 믿는 생각이 꽤 깊게 박혔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땀은 배신하지 않더라. 최소한 내가 끝까지 버티고 버텨 흘린 땀은 시간이 걸릴지 언정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하루동안 내 뇌 주름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코르티졸을 운동을 하면서 깊은 호흡과 땀으로 배출을 할 수 있다. 별안간 뭘 하든 쌓이는 스트레스와 잡념을 매일매일 덜어내고 있다. 그렇게 약 1시간동안 내 몸에 쌓인 부정적인 요소를 배출하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이렇게 운동을 하다 보면 주말 즈음에는 몸에 무리가 오는 게 스멀스멀 느껴진다. 이 때에 갖는 온전한 휴식은 또 다른 의미의 운동이다. 이 전에는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운동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주말동안 운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월요일부터 운동을 시작하면 휴식하는 시간동안 회복을 넘어 성장을 한 내 몸의 상태가 느껴진다. 진정한 쉼을 느끼고 있다. 나의 몸과 정신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운동도 천천히 회복도 천천히 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러나 매일 한 발 한 발 내딛는 나의 성장을 느끼는 게 재미있다. 


  둘.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책을 내다니. 그것도 ‘운동’을 주제로 글을 쓰다니. 엘리트 체육을 전공하지 않았고 학원 체육조차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기껏 동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다치기만 했다. 시작조차 하지 않은 가벼운 취미를 이렇게 무겁게 다루는 게 민망하다. 내 이야기로 쓸 수 있는 주제가 겨우 내 몸뚱이뿐 인가 하는 내 인생에 대한 한심함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사는 것도 결국 내 몸을 가지고 사는 일이니 내 몸에 대해 내가 느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솔직해지자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글을 썼다. 마무리를 하기가 너무 어렵다. 시작조차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그런 걸 까. 퇴고를 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내가 지금까지 써 내린 글을 다시 보기에도 겁난다. 나 혼자 보기에도 민망한 일기장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책을 내기 위한 재료로 쓰이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이 글의 마무리만큼은 멋지게 하고 싶다. 결국 내 얘기다. 멋지지 않은 내가 어떻게 내가 만족할 만한 멋을 낼 수 있을까 싶다. 그저 감사하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길게 써 내려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다. 나를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의 발바닥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의 신체적 변화는 하향 곡선을 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운동 경력과 실력 그리고 절제력을 통해 아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늙어가고 싶다. 


  나는 ‘겹벚꽃’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봄의 끝자락에서 계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가장 강렬한 분홍색과 풍성한 꽃잎을 뽐내는 겹벚꽃을 좋아한다. 그 진한 색깔을 폭발하듯 뽐내기 위해서 꽃망울은 봄이라는 짧은 시간 내내 조용히 숨을 고르며 피어날 준비를 한다. 가장 밖에 있기 좋은 온도와 바람, 햇빛 사이에서 다른 벚꽃과 개나리들은 봄을 즐기며 꽃잎을 자랑한다. 그 사이 겹벚꽃은 더욱 조용히 꽃망울을 품는다. 눈에 담기에도 모자란 풍성하고 하얀 벚꽃 사이에서 꽃망울을 새파랗게 품는다. 벚꽃과 개나리가 봄비에 젖어 떨어질 때에도 변함없이 꽃망울은 조금씩 망울을 키워 나갈 뿐이다. 봄바람이 휘날려도 겹벚꽃 나뭇가지는 꽃망울을 단단히 붙잡고 버틴다. 그리고 봄비가 한바탕 꽃잎들을 쓸어가고 나면 겹벚꽃 가지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모두가 인생의 때가 지났다고 했을 때 피는 꽃이 되고 싶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농염하게 타오르고 싶다. 나 이제야 꽃피우려고 이렇게 참았다. 눈물로 참았다. 이 감정을 분출하고 싶을 만큼 강렬한 꽃을 피우고 싶다. 여기저기에서 치이고 닳고 닳아 오갈 것 없는 인생이 될 것인지, 부딪히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면서 단단하게 살아남은 내가 될 것인 지는 지금 나의 선택에 달렸다고 믿는다. 시간이 중요하지는 않다.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보니 그저 내가 원하는 때가 가장 적당한 때인 것 같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나는 나의 때를 위해 운동을 하고 글을 쓰면서 잔뜩 힘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 어느 하나 긍정적인 단어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당장 포기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이끌어내고 있다.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다. 좋은 사람은 될 수 없다. 착한 사람도 될 수 없다. 잘 사는 사람은 꿈도 꾸지 않는다. 잘 버틴 사람이 되고 싶다. 잘 버티고 버텨서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행복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만족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늘도 나는 모든 방면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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