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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까만 오른발 Jan 24. 2022

종양, 연골, 십자인대 그리고 재활

내 평생 가장 아픈 날들

  나는 무릎이 제일 약하다. 심각한 무릎 부상을 여러 번 당했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약한 무릎과의 악연을 다시 생각해보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무엇보다도 나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나와 함께 울었던 우리 어머니와 무릎을 이미 심하게 다친 적이 있던 아버지가 당신을 닮아 아들마저 아프다며 자책하시며 술에 취해 당신 가슴을 수없이 내리치던 때가 생각이 난다. 2004년 겨울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왼쪽 무릎에 난 검지 손가락만 한 종양 제거를 했던 때다. 다리를 절고 걸으며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한 채 중2병을 견뎌냈다. 그때부터 나는 뛰고 싶었던 것 같다. 무작정 다리에 힘을 주고 내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산다는 것부터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군대에서 상병 말 호봉쯤 2011년 7월에 장마철 한밤중에 탄약고 경계 근무를 마치고 근무 교대를 하고 건물 3층쯤 되는 높이의 철제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굴러 떨어져 배수로에 무릎을 부딪쳤다. 그렇게 우측 십자인대와 반월상 연골판 파열로 대전 국군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나는 2011년 11월에 의병제대를 했다.      



  이후 2015년 겨울 즈음 취업준비 도중 갑자기 잡힌 축구 경기에 용병으로 뛰다가 상대방의 깊은 태클에 왼쪽 무릎이 꺾여 돌아가 전방 십자인대 파열 및 내측 인대 손상, 연골이 찢어졌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시절이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실손 보험 만기일이 일주일이 남은 상태에서 다친 터라 하루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내 다리는 바닥을 뜰 수 없었다. 방바닥을 끌며 힘을 줄 수 조차 없이 기어 다니니 부모님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왼쪽 무릎이라서 병원까지 운전을 하면서 갈 수는 있었다. 혹시 몰라 창고에 뒀던 중학생 때 산 목발을 10년 만에 다시 짚을 줄이야. 부풀어 오르다 못해 반짝이고 열이 오른 오른쪽 무릎을 바라보며 대전 탄방동에 소재한 조 X영 정형외과에 방문했다. MRI를 찍고 바로 수술 일정을 잡았다. 무릎 수술 내용을 요약하자면 당시 박지성 선수의 고질적인 무릎 부상의 증상과 비슷했다. 무릎 연골 부분에 위치한 뼈에 여러 구멍을 뚫어 연골액을 흘러내리게 한 후 연골이 자리 잡을 때까지 무릎을 쓰지 않는 수술요법을 시행했다. 내 수술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앞으로 두 달 동안 절대 발바닥을 땅에 디뎌서는 안 됐다. 연골이 내 무릎을 감싸는 모양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 어떠한 압력도 가해서는 안됐다.      



  또다시 제대로 서지 못하고 집안 바닥을 기어 다녔다. 엉덩이로 걸어 다녔다. 1M 위로 서지 못했다. 화장실도 기어 다녔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바지와 속옷을 먼저 벗고 차가운 타일 바닥을 엉덩이로 디디며 차갑고 미끄러운 변기에 서슴없이 손을 짚고 올라가 용변을 봤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누구의 도움도, 눈빛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반신 마취를 하면서 차라리 전신마취를 해서 다시는 이 깊은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축구를 하지 말 걸 하고 후회했다. 내가 중학생 때 다치지 않았더라면, 군대에서 다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에 후회만 거듭했다. 수술을 하고 나서 재활을 하고 정상적으로 걷는 데까지 시간과 비용이 추가적으로 들기에 그 부담을 감당하는 것에 겁이 났다. 정형외과 수술은 수술 후에 재활이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시간이 곧 해답이다. 수술 후에 재활을 하는 고통 또한 잊을 수 없다. 쉽고 빠르게 굳은 근육을 풀어야 하고 소실된 근력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재활도 앞당길 수 있다.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내가 보낸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그저 주저앉을 수 없었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고 이후 바로 재활을 시작했다.     



  근력을 회복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이미 말라버린 근육과 굳어버린 관절을 다시 정상화하는 일은 어렵고 긴 싸움이었다. 양쪽 근력을 일반인 관점에서 정상화하는 기간은 내 기준으로 약 5년 정도가 소요됐다. 정말 천천히 신중하게 접근했다. 내 양쪽 무릎은 이미 퇴행성 관절염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근력으로 내 무릎을 보호해야 했다. 무릎에 가해지는 부하를 최소화하기 위해 체중을 조절해야 했고 근력을 강화하고 유지해야 했다. 이때부터 통상 ‘헬스’라 부르는 중량운동을 시작했다. 내 몸에 붙은 근육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자극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첫 운동 스승님은 충남에서는 꽤 유명한 보디빌더였다. 시에서 운영하는 체육 시설에 시간제 강사인 선생님은 나에게 보디빌딩을 알려주셨다. 같은 동작이라도 어느 근육에 집중해서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몸에 붙어서 움직이는 근육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움직이는 원리가 신기했다. 알면 알아갈 수 록 다치지 않고 운동을 하는 방법을 알아갔다. 그리고 내가 왜 다칠 수밖에 없었던 자세를 취했고 어떤 생활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내 몸에 정형외과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내 몸을 공부했다. 힘줄이 붓는 등 가벼운 부상은 성장의 밑거름이라 여기며 관절이 날카롭게 아플 때는 과감히 운동을 쉬었다. 중량 운동 초기에는 다양한 근육에 집중을 할 수 없어서 팔만 두꺼워졌다. 그저 팔힘으로 당기고 미는 자세만 어설프게 흉내를 냈다. 그래서 운동을 했던 몸이 되어가기보다 그저 살과 근육이 섞인 흉측한 몸이 되어 갔다. 그렇게 무식하게 힘만 쓰던 운동을 하면서 몸은 점점 굳어갔다. 운동을 하는데 어깨와 허리 통증은 심해졌다. 그러면서 우연한 기회에 보디빌딩 외에 요가를 바탕으로 스트레칭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무리한 운동으로 인해 뭉친 근육을 풀다 보니 내 몸과 마음의 긴장도 풀리면서 정신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중량운동과 스트레칭을 병행하다 보니 내 몸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의 모양이 비슷해져 갔다. 그리고 체지방률은 내려가면서 근육량은 올라갔다. 체형 자체가 커지는데 체중은 그대로였다. 약 5년 정도가 지나서 내 몸이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트랙에 올라섰다. 가벼운 조깅을 5년 만에 시작해봤다. 3일에 한번 정도 트랙을 뛰었다. 다음 날 무릎은 부어있었다. 그렇게 3일 동안 무릎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매일 저녁마다 얼음을 댔다. 그렇게 6개월을 반복하니 무릎은 달리기에 적응이라도 한 듯이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6년 만에 축구를 다시 시작했다. 6년 전 나는 축구화와 유니폼을 모두 버렸었다. 축구를 하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연락도 한순간에 끊어냈다. 그렇게 6년을 버텼다. 하지만 내 마음마저 버리지는 못했다. 친구의 직장 동호회에 따라다니며 조금씩 몸을 올려봤다. 오랜만에 내 발 안쪽으로 공을 품어봤다. 정말 어색했다. 6년 만에 다시 축구를 한다 하니 여자 친구는 나를 응원해줬다. 내 생일 선물로 사준 하얀 축구화는 지금도 신발장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 마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그저 즐겼다. 즐겼다. 공을 잡고 뛰어 들어가는 우리 편 선수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빈 공간으로 공을 툭 찔러 넣는 역할을 좋아했다. 그리고 수비를 할 때에는 바짝 상대에게 붙어 공을 뺏는 걸 좋아했다. 그저 운동장에서 그런 역할을 할 뿐이었다. 나는 왜 이런 게 재미있을까.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저 좋아할 뿐이지 그다지 잘하지는 않는다. 그저 즐기고 좋아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잘하고 싶고 계속하고 싶어서 나는 내 몸까지 버려가면서 버텼다.      



  직업도 내가 좋아하는 걸 즐기고 싶은 걸로 바꾸고 싶다. 그 용기와 방법과 수단의 선택과 내 정신의 수양을 부캐인 운동으로 가다듬는 듯하다. 그저 실패뿐인 내 인생에 즐기는 걸 목적으로 하는 이 운동은 나에게 여유를 준다. 이 여유를 쟁취하기 위해 내 나름 숱한 싸움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도 싸워갈 용기를 나는 부캐를 통해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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