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인간의 과거(6) - 버려지다
유능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각인. 그 각인이 시려올 뿐이다.
연애를 한다.
벌써 80일이 돼 간다.
그동안에 겪었던 내적 갈등들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갈등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나는 아직도 이따금씩 이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주는 커다란 애정과 사랑이
때로는 한없이 고맙게만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마음에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저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순수하고 열정적이기만 하다.
나에게 주는 사랑과 마음에 아끼는 것이 하나 없고
내가 생각했던 나의 단점까지도 사랑하는 자세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우, 그리고 감정적인 공감과 위로.
이런 삭막한 현대사회에서 저렇게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은 나에겐 아주 이상적인, 유니콘 같은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나는 회피형 인간으로서 한때 외모도 능력도 아주 이상적인 인간을 이상형으로 꼽았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저 보통의 인간이었다.
모두가 그렇듯, 나도 그렇듯 그 사람도 그저 보통의 인간.
다만 나는 사랑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니
그 사람의 사랑이 다소 이상적으로 보였던 거겠지.
감정에 솔직한 사람은 사랑스럽다.
나 같은 감정 회피형 인간과는 달리 무지갯빛을 내니까.
저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한다면
나도 저 사람의 사랑스러움을 닮을 수 있을까.
그런 마음에 오늘도 그 사람 곁을 지켜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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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건
고 3, 내가 입시에 실패한 이후부터였다.
입시 때 종종 드디어 sky에 가는 거냐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지시던 아빠는
수시도 정시도 말아먹은 내가 적잖이 실망스러우셨나 보다.
“쫑파티? 거긴 승리자들만 가는 곳 아니야?”
스무 살이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친구들과 쫑파티를 하기로 했다는 말에 아빠가 하셨던 말이다.
대학교 입시의 승리자들만이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받을 수 있다는 말일까.
나는 재수를 하게 된 낙오자니까 고등학교 3년간의 시간을 축복으로 보내줄 자격도 없다는 말일까.
내가 쫑파티에 가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아빠에게 발작버튼이 눌렸다.
“재수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뭐, 죄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왜 말을 흐리시는지. 아빠 머릿속의 나는 이미 ‘대입 패배자’라는 이미지로 자리 잡혔나 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 ‘스무 살을 맞이한 딸’ 등등
그 시기의 나를 칭할 수 있는 단어로는 더 다양한 말들이 있었을 텐데도.
재수가 죄는 아니지 않냐는 질문에 말을 흐리셨던 아빠는
사실상 ‘대입 패배자’인 나를 죄인처럼 여기고 계셨다.
나는 대학교 입시에서 패배했으니, 부모님께 죄책감을 가지고 자숙하길 바라시는 듯했다.
아빠는 모든 입시가 끝나고 좋아하던 가수의 콘서트에 보내달라 했던 딸에게 크게 실망했다 하셨다.
“난 그때 얘가 시험 잘 본 줄 알았잖아.”
“입시도 망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콘서트 보내달라는 소리가 나오지?”
뭐, 아빠 입장도 이해는 된다.
아빠에게 학생의 본분은 공부고, 자식의 본분은 좋은 대학에 합격해 효도하는 거겠지.
그런 사고의 흐름이라면
제대로 학생과 자식의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하고 놀러 가겠다는 딸이 뻔뻔하기 짝이 없어 보였겠지.
그래 이해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빠는 제대로 된 부모역할을 수행하긴 하셨는지.
내가 생각하는 부모의 역할은 자식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죄인의 꼬리표를 달고 재수를 시작했다.
재수 1년 동안에도 아빠의 시야에 비친 딸은 늘 ‘입시패배자’라는 죄인의 꼬리표를 단 모습이었나 보다.
초중고 시절, 공부학원은 하나도 다니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재수종합학원을 끊어 돈이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건강도 안 좋아진 탓에 병원비에 약값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안 그래도 탐탁지 않던 죄인에게 돈까지 들어가면 얼마나 눈꼴 시려울까.
“아주 돈벌레네, 돈벌레야.”
아빠는 아픈 나를 보며 ‘돈벌레’라는 이미지를 떠올리셨나 보다.
“아픈 딸”, “불쌍한 딸” 등등
그때의 나를 칭할 수 있는 단어로는 더 다양한 말들이 있었을 텐데도.
병적으로 졸려서 힘들어하는 나에게
조는 거 솔직히 핑계 아니냐고 물으셨던 아빠.
스트레스 때문에 새치가 많아져 검은색으로 염색하겠다는 나에게
수험생 신분에 안 맞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다고 말씀하시던 아빠.
교보문고를 간다고 하는 나에게
사실 놀러 가는 거 아니냐며 의심하시던 아빠.
그때 아빠의 시야에 비친 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
학원에서도 매일같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공부하고,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가 안 돼서 하루 세끼를 죽으로 때우는 나인데.
맨날 병원에, 약국을 오가며 비정상적으로 말라가는 나를 지켜봤으면서도
저분의 눈에는 내가 그저 ‘실패자’로만 보였던 걸까.
그리고 나의 전부를 쏟아부었던 2020년의 수능,
나는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지방에 내려가 계셨던 아빠는
내가 수능을 망쳤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고서는
“에이씨-“하는 실망 섞인 부정적 감탄사를 내뱉으셨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실패자’ 이미지는 복구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졌다.
완전히 실패자로 각인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자유로워진 거다.
이제 수의대도 못 간다. sky도 못 간다.
드디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다.
이상하리만치 기뻤다.
나는 입시를 망하고 나서야 내가 정말로 가고 싶었던 곳을 말할 수 있게 됐다.
“미대에 가고 싶어요.”
웹툰작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졌던 꿈이었다.
학업 스트레스로 자해 충동이 들 때마다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그림을 그리곤 했었는데, 그때부터 꿈꾸게 되었다.
나는 고통받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현실을,
그리고 말을 추모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미대에 가고 싶다는 말을 들은 아빠는 처음에는 별수 없다는 듯 그렇게 하라 하셨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미대는 돈을 많이 못 번다며 다른 곳은 어떻냐는 말이었다.
“화장품 연구원 어때?”
간신히 내 손에 들어온 자유가 또다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결국 지금껏 억눌러왔던 울분이 터졌다.
“제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세요!!!!!!!!!!!!!!!!!!!” 엉엉 울며 소리 쳤다.
아빠는 그걸 듣고서는 기가 찬다는 듯
“……. 너 웃긴다. 내가 언제 너 하고 싶은 거 하지 말랬냐?”
“수의사도 네가 하고 싶다 해서 허락해 준 거였잖아!!!!!!”
아빠는 자신이 내 진로에 대해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 분명 그게 아닌데.
그럼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내적 갈등들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단 말인가.
결국 모든 게 나의 피해망상이었단 말인가.
피해자도 나, 가해자도 나란 말인가.
그렇담 아빠는 나의 고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하지만 곧 의문이 풀렸다.
아빠는 결국 내가 미대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내 성적대에 맞는 대학교와 학과 리스트를 뽑아 오라 하셨다.
“………. 심각하네. 너 1년 동안 대체 뭐 했냐?”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까지 얹어가면서.
아빠는 아빠가 볼 때 괜찮아 보이는 학과들을 뽑아 놓고서는
그것들을 조사한 후 가고 싶은 학과순으로 우선순위를 매기라 하셨다.
참 웃겼다. 나는 이미 가고 싶은 학과를 말했는데.
내가 원하지도 않는 집합 속에서 원하는 것을 택하라 하다니.
이게 아빠의 방식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수의대에 가야 한다는 강박도, 명문대에 가야 한다는 강박도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걸. 나의 피해망상이 아니라는 걸.
이건 아빠가 자주 쓰는 가스라이팅 방법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미 배제한 후
본인이 원하는 것들만 후보군으로 내보이며 원하는 걸 뽑으라 하고서는
내가 뽑았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인정해 줬다는 식의 교묘한 가스라이팅.
그렇게 아빠는 자신의 강요를 합리화하시곤 했다. 그동안 나는 이런 방식에 세뇌당했던 거다.
결국 나는 아빠가 골라준 리스트에서 가고 싶은 순으로 top 3을 정했다.
원래는 미대를 복수 전공할 수 있는 학교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top3마저도 내가 아빠의 말을 무시했다며 아빠에 의해 다시 매겨졌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1순위였던 학과로 대학을 왔다.
정시로 쓴 세 곳은 모두 붙었지만
나는 세 곳 중 가장 낮았던 학교로 최초합되어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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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빠는 나에게 말도 걸지 않는다.
입시실패의 실망과 더불어, 내가 아빠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려 했던 것 때문일 거다.
5년 전만 해도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야.”
“너는 sky도 갈 수 있는 머리라니까?”
소리를 듣던 나는,
지금은
“난 너랑 네 오빠가 잘못 컸다고 생각한다.”
“네가 성격이 나빠서 회사 생활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성쓰레기. 싹수가 노래서 데리고 다니기도 싫다.”
소리를 듣게 되었다.
20년 동안 기대했던 딸이 썩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선 추락했다.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안겨준 성격 나쁜 딸.
그렇게 20살의 나는 아빠의 기대에서 버려졌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때 아빠가 강요했던 선택은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학과공부도 잘 맞고, 전망도 밝은 편이다.
나보다 30년은 더 살아오신 분이니까
겨우 20살 병아리였던 나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겠지.
나는 그 나이가 되어본 적이 없기에 아빠의 사고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나의 선택을 무시했던 아빠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리고 ‘버려졌다’는 다소 과격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아빠가 나에 대한 애정까지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라는 걸 안다.
다 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 어렸을 적 나를 대하던 아빠의 태도와
현재의 나를 대하는 아빠의 태도가 절로 비교가 된다. 절로 가슴이 아린다.
아빠가 나를 대했던 태도, 그 조건부적인 사랑.
내가 유능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각인.
그 각인이 이따금씩 시려올 뿐이다.
나는 그저 그게 좋았을 뿐이었는데.
재수시절, 170cm에 43kg까지 말라가던 당시
딱 한 번, 뼈만 남은 나를 보며 “볼 때마다 안쓰럽다… 불쌍해서 어째.”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때의 그 걱정 섞인 말투와 함께 짓던 표정.
그 따뜻함.
나는 그게 좋았는데.
나는 그게 좋았을 뿐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