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회사 정리기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당장 다음 달까지 일하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에 일이 되질 않았다.
2주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 뒤로 “그래도 끝까지 정리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슬픈 부탁을 들었다.
그러면서 대표는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고 원하신다면 합류하실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먹거리가 없는,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한다. 장담할 수 없는 미래다. 그래서 판단은 개인의 몫이나 같이 하면 좋겠다.”
회사는 지금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직원들은 얼마나 일할 수 있는지, 갑작스러운 실직 상황에서 직원에 대한 금적적인 보상이 있는지, 어렵다면 어떤 대책 마련을 할 수 있는지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런 지진한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대자보 쓰듯 글을 써 내려갔다. <회사 대표 및 경영진께>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아래는 간략한 개요다.
<회사 대표 및 경영진께>_답변 요청서
1. 현재 상황
- 회사는 다수의 직원에게 연말 이후 근로를 지속하기 어렵다 밝혔음. 이유가 무엇인지.
- 회사는 경영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 회사는 연말 이후 근로가 어려운 근로자를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2. 근로조건
- 회사에서 전과 동일한 급여를 보장하며 근무를 할 수 있는 기한은 언제까지인지.
- 최종 급여 지급일은 언제인지.
3. 후속 조치
- 권고사직, 해고의 경우 위로금 지급 계획이 있는지
- 금전적인 보상이 어렵다면 현실 가능한 지원책이 있는지.
4. 후속 업무
- 근로자는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
- 근무 가능 일자(연말) 이전 다수 퇴직/이직자 발생에 대한 업무 공백에 대한 대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 남은 사업에 대해 회사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 니즈는 무엇인지.
우린 동아리가 아니다. 회사라면 이 어려운 상황 전달 이후 대책을 내놓거나 최소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우린 너무나 스타트업이었고, 이런 절차는 없었다.
‘이래서 노조가 필요한 것일까’ 쓰는 내내 아쉬웠다. 이 문서에선 감정 공유보단 정확한 대책 요구가 필요했다.
회사가 휘청대면 한 직원과 가정은 휘청댈 땅도 없어진다. 아래는 회사 대표와 경영진에게 보낸 메일의 마지막 문장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와 직원이 아닌 좋은 동료로서도, 더 나은 선택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더 실망하고 싶진 않다.
더한 실망은 내가 진심으로 하던 프로젝트까지 미워하게 될 것 같기 때문에.
*커버 : @sirjoancorne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