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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A Aug 19. 2016

주제는 딱히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맘때면 온 몸에 기운이 없단 말이지. 물을 먹어 축 늘어진 솜이불만큼 이나 볼품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더란 말이지.     


단 한 순간도 즐겁게 호흡하기를 바라지 않는 못된 계절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분명 어렸을 땐 이런 날씨에도 들고 뛰고 난리 버거지를 쳤었던 것 같은데, 어째 크면서부터 더위에 대한 면역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 덕분에 타서 거뭇한 사람들의 얼굴과는 달리 내 피부는 점점 뽀얘져 갔다.     


창밖을 보기만 해도 눈이 흘러 녹아버릴 것 같은 햇볕. 아무리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상처는 흉하게 벌어진 이후였다. 위로가 되지 않는다. 혹은 더디다. 뒤늦은 수습으로는 아물지 않는 생채기들. 흘러버린 눈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이미 타 버린 살갗이 바로 돌아오지 않듯. 어쩔 수 없이, 꼼짝 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계절이 오기 전부터 나의 소원은 추운 것이 당연한 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두터운 옷이 일상복인 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눈부신 흰 색으로 뒤덮인 나라, 색이 많지 않아서 내 보금자리가 소중해 보이는 나라에서의 삶 이었다. 색이 많지 않은 나라가 부러웠던 것은, 아마도 색이 많은 이 나라에서의 내 집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소중해 졌으면 좋겠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가진 것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는 자신이 가장 초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중한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달달, 돌아가는 선풍기가 작은 속삭임으로 나를 현실에 묶어두면, 또 한없이 무료하고 치열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 시간엔 대부분 눕는다. 시간을 버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정말로 삶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처럼. 갖고 있던 희망마저 쓰레기통에 던져둔 채 눕는다.    


시간이 똑, 딱, 하면 흐른다고. 누가 만든 지도 모르는 단위를 하나씩 보내다 보면 나는 또 나를 지나쳐 온다. 생각을 말을 행동을 하나라도 더 쌓아버렸다. 똑같은 행위를 한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매 순간마다 쌓은 블록들이 당신이 되었다고. 머무르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계산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과연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묻는 나는 또 의미 없는 블록을 쌓으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 더위와 시간을 거하게 먹고는 그것을 토 할 생각이 없는 늙은이가 저기 누워 있다. 아픈 노인네를 앞에 두고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이게 삶의 말로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면 나는 과감히 중간에 스스로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을 것도 같다. 땀을 뻘뻘 흘리겠지만 찬 것을 먹으면 안 돼요. 입맛이 없겠지만 자극적인 건 먹으면 안돼요. 혼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눈을 껌뻑 거리는 것과 사람을 부리는 것뿐이다.     


우리도 할머니가 되겠지?    


늙을 거라는 이야기만큼 현실성 없는 얘기가 과연 몇 개나 있을까. 나이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 쉴 새 없이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육체가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차라리 내일 당장 차에 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믿기 쉬울 것 같다. 일곱 살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선생님일까. 그러니까 내가 선생님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거다. 열네 살 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이 된다니. 키가 자라고 가슴이 자란다고 어른이 된다니. 그렇게 스무 살이 되어서도 별 다르지 않았다. 남들은 해방되었다며 즐거워 할 때 혼자서 어른과 가까워진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했다. 언제 먹은 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먹었다.    


바라는 대로 살았다. 언어를 익히고 수학을 하고,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기 위해 자기 소개서를 썼다. 단 한 순간도 미친 듯이 치열한 적은 없었으나, 치열하지 않았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탄생을 마주하고, 또 누군가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허무해 졌다. 어떤 이의 인생에라도 한 번씩은 찾아온다는 그런 허무함.    


저런 볼품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그렇게 일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눈치를 보며 공부를 해 왔단 말인가. 즐거운 늙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늙어서 아프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보살펴줄 이 없을지 모른다는 걸 누가 아는가. 몸이 썩어문드러져 가도 스스로 평생을 책임 져야 한다면, 그것이 삶의 마지막 부분이라면 과연 당장의 행복 보다 합리적인 것은 무엇일 텐가.    


잔인한 생각들. 저렇게 아픈 사람을 두고서는 한다는 생각이 고작 그런 것들. 결국에 이런 인간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쾌차 보다 나의 최후가 고민이라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이다. 그런 나를 의지하는 당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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