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사원 Aug 12. 2018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자존감이 낮은 너에게


나르시시즘에 빠진 나를 구제하는 <에로스의 종말>. 꼭 여러번 반복해 읽어야지 싶었고, 이 책을 쓰기 전 나왔다는 <피로사회>라는 책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거 같다.



작가가 현대사회를 '에로스의 종말'이라 이야기 한 것은 나와 타자를 분리시켜 생각할 줄 알며,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의 형태가 보기 드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오늘날 흔히들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는 '여'적이다. 상냥하고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 우리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연애의 모습이라 느낀다. 꼭 연인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혹, 주변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연인 관계를 보았다면 그것은 그 두명이 모두 자기애적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공간다름에 대한 인정이 만나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생활하는 그런 사람들.


'자존감'에 대한 논의가 짙어지는 요즘이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낮추는 형태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맞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SNS의 타임라인을 보라.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일상이 한순간에 쏟아진다.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그것들을 보며, 현재의 나 알게 모르게 비교하고는 희열 또는 을 맛볼 때 나의 기분은.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58p.


자존감의 회복탄력성


자존감은 회복의 탄력성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상처를 받고 나락으로 떨어진다한들, 그것을 툭툭 털고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그러나 한번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을 때 자기만의 동굴에서 쉬이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자존감이 낮다'라고 한다.

성과주의적이고 관계주의적인 한국사회는 자존감을 낮출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성공사례만 주구장창 접하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의 크기가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야속하게도 주변사람들은 '힘내, 너는 할 수 있어!'라는 공허한 위로의 외침만 남긴 채 실패에 대한 책임은 나몰라 뒤돌아버리면 그만이다. 실패는 온전히 나 자신의 몫이다.


'나'는 나이다. 타인과 나를 구분짓지 못하고 인생의 잣대를 타인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동일자의 지옥'이다. 나는 나고, 상대방은 상대방일뿐 우리가 서로의 삶에 간섭할 의무나 책임은 존재치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나를 온전히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19p.)


나는 이 대목에서 사랑의 '방법'과 '방향성' 대해서 다시 생각하였고, 내가 아직 사랑할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타인의 공간을 중시하며 사랑해야 한다. 동시에 ''와의 관계에서도 에로스는 필요하다. 나 스스로 타인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쉽게 우울함에 빠지는 것도 우리 안에 에로스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이 나에게 온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꺽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ego)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이러한 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20p.)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을 얻는다'는 상투적인 말.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나서는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좋은 사람'이란 자기애적 사람이다.


이 책을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담겨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은 운명같은 사랑을 자기와는 먼 이야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의 현재 모습이 다른 사람에 비해 볼품없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보았고, 내가 줄곧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내게 좋은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운명을 탓하기 보다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게 되었다.


3포, 5포 세대라 불리는 성과주의 체제 하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너는 진정 어떤 사람인지 묻고 싶다. 너는 타인과 너의 '다름'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사람인지, 너의 기준에 타인을 끼워 맞추려 하지는 않았는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결론내린 것은 없는지, 타인을 조금만 더 존중할 수는 없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자존감칭찬 몇마디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다른 삶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며칠 전 친구에게 건넸던 위로의 말들이 미안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앞으로 사소한 충고 하나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 존중해야겠단 다짐이 섰다.



안 물어봤습니다만?


'안물안궁'이라는 말이 있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쓰이는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로 역시나 안 궁금하다는 얘기다. 사람에겐 알 권리만큼이나 모를 권리가 중요하다. 수십개씩 밀려 들어오는 수 많은 정보 중,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사실 몇가지뿐이다. 그렇기에 '모를 권리'는 더욱 중요하다.


이쯤되니 너무 삭막한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하며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정말 친한 친구나 연인이 아닌 이상, 우리는 직장 동료가 오늘 무엇을 했고 내일 무엇을 할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인정해야 한다! 남과 내가 엄연한 타자라는 것을. 이것이 우선이 되어야만 내가 나를 판단할 때 타인과 비교하지 않게 된다. 자존감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타자화' 연습부터가 우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tmi, 안물안궁과 같이 타인의 말을 재치있게 끊어낼 수 있는 무언가 나왔다는 사실이 매우 반갑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정보가 인생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죽어가던 에로스가 부활을 꿈꾸는 단계가 아닐까? 개인이 개인의 삶을 존중할 줄 아는 진정한 개인주의자가 되었을 때, 다시금 에로스의 부활도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제목 에로스의 종말

지은이 한병철

평점 4.0점

추천하는 한마디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매거진의 이전글 최형아 <굿바이, 세븐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