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내 사랑

by 송이


길었던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던 날, 엄마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잡채, 불고기, 미역국까지—귀국 전 통화에서 내가 먹고 싶다던 음식들이 한 상 가득 펼쳐져 있었다. 배불리 먹고 만족스레 배를 두드리는데, 엄마가 “짜잔!” 하며 분홍빛 복숭아 세 알을 쟁반에 담아 들고 오셨다.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정말 복숭아야?”

엄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복숭아를 칼로 자르기 시작했다. 나는 칼로 자르지 않은 온전한 복숭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얀 솜털이 보들보들한 복숭아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주저 없이 한입 깨물자 상큼한 과즙이 톡 하고 터졌다. 입가에 복숭아 과즙이 흘렀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과즙을 닦을 겨를도 없이, 복숭아 하나를 단숨에 해치웠다. 그토록 그리웠던 바로 그 맛이었다.

사실 나는 ‘복숭아 귀신’이라 불릴 만큼 복숭아를 좋아한다. 물렁한 복숭아든 단단한 복숭아든 가리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복숭아를 좋아하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엔 늘 복숭아가 넘쳐났고, 나는 자연스레 그 맛에 익숙해졌다. 고운 색과 향기, 입안에서 퍼지는 달콤한 과즙—복숭아는 나에게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여름을 상징하는 선물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캐나다 유학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과일도 복숭아였다. 그땐 복숭아 철도 아니었지만, 아빠가 어디선가 어렵게 구해 주신 복숭아를 먹고 인천공항으로 떠났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몰랐다. 몇 달 뒤, 그 복숭아 한 알이 그렇게 그리워질 줄은.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외로웠다. 학업 스트레스에 시차와 언어의 벽까지 겹치면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한인 마트에서 재료를 사다 떡볶이도 만들고 김치볶음밥도 해 봤지만, 마음 깊은 곳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던 어느 저녁, 나는 저녁도 거른 채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날 엄마는 시장에서 복숭아를 사며 내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

“우리 복숭아 귀신 복숭아 너무 먹고 싶겠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랬다. 나는 엄마, 아빠와 같이 앉아 복숭아를 먹던 그 시간들이 너무 그리웠다. 얼른 이 외로운 타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엄마, 아빠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 방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데 흐느낌을 들었는지 호스트 부부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캐네디언 부부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저녁을 먹지 않고 울고 있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우는 나를 달래주며 배고프지 않냐고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가 된 듯, 엉엉 울며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길로 아저씨는 차를 몰고 나가 마트에서 복숭아를 사 오셨다. 플랫 피치라고 부르는 납작 복숭아를 한 봉지 사 오셨는데 맛은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맛이 아니었다. 나는 동그랗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분홍색 황도가 먹고 싶었다. 엄마가 늘 사다 주시던 그 복숭아.

캐나다의 납작 복숭아는 내 향수를 달래주기에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복숭아를 사러 다녀오신 아저씨가 정말 고마웠다. 여기서도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따뜻해졌다. 아저씨가 사다 주신 복숭아를 먹으며 나는 기운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복숭아를 사다 주셨는데 역시나 한국에서 먹던 복숭아의 맛은 느낄 수가 없었다.

향수병으로 힘든 유학 시절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드디어 엄마, 아빠와 마주 앉아 복숭아를 먹게 되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그 맛. 캐나다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 복숭아 귀신이라 그런지 맛있게도 먹는다며 그렇게 먹고 싶었냐고 아빠가 물었다.

“아 그런데 지금 복숭아 철 아니잖아. 어디서 구했어?”
“아빠가 장호원 가서 사 왔지.”

아빠는 장호원의 복숭아가 맛있다며 아빠는 자주 그곳에서 복숭아를 사 오시고는 했다. 장호원의 복숭아 농장에서 구해왔다는 황도 복숭아에는 아빠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달콤한 과즙이 아빠의 사랑과 함께 온몸으로 퍼졌다.

그날 밤, 배부름과 함께 가슴 벅찬 행복을 안고 잠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복숭아는 더 이상 내게 단순한 여름 과일이 아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견디고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단단해진 복숭아처럼, 힘든 시간을 견디고 돌아온 나에게 주어지는 위안이었고, 언제든 나를 포근하게 맞아주실 부모님의 변치 않은 사랑이었다.

이전의 여름이 그랬듯 앞으로의 여름도 복숭아와 함께 달콤하고 행복하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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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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