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빈자리에, 스스로 여문 청춘이 건네준 다짐
나의 일터는 젊은 활력이 넘치는 테마파크입니다. 다양한 젊은이들의 기운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지요. 어느덧 이곳에서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만이라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매일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들과 소중한 인연이 되면 그들의 다양한 사연을 들을 수 있는 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인데요. 기억에 남는 청춘의 기록이 많습니다.
그날도,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이제 막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젊은 청년. 새하얀 도화지 같기도 하고, 잔잔한 호수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젊은이는 이내 곧 자신을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며, 무엇보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설픈 꾸밈이 아니라, 애써 삶을 지탱해 온 단단함에서 피어나는 진솔함이라는 것을 저는 직감했습니다.
딱딱할 수 있는 면담의 분위기를 다독이고자, 저는 중간중간 농담을 건네며 젊은이의 마음을 풀어주려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이었을까요, 대화는 차츰 깊이를 더해갔고, 저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젊은이의 내면 깊숙한 곳의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에게 두 개의 종교가 있다고 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 자신의 상황과 마음에 따라 각 종교가 주는 이점에 의지하고 기댈 수가 있다는 설명에는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좋아하는 야구팀 역시 일부러(?) 두 군데를 응원한다는 이야기에는 '굳이?' 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젊은이의 해맑은 설명 속에서 알 수 없는 특별함이 어른거렸습니다.
환하고 옹골찬 기운을 뿜어내던 젊은이에게, 한여름임에도 긴팔 유니폼과 토시를 두른 모습은 마치 의문 부호처럼 다가왔습니다. 덥지 않냐는 제 질문에 젊은이는 살며시 웃으며 문신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단순한 상처가 아님에 안도하는 순간도 잠시, 듣다 보니 젊은이의 몸에 새겨진 생각보다 많은 문신들은 마치 숲 속의 오래된 나무처럼, 젊은이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이야기들이리라 짐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나직이, 힘들 시기마다 문신을 새기며 고난을 이겨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젊은이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깊고, 아릿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아픔, 어머니의 지병은 그 작은 어깨에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지웠더군요. 기대야 할 하나뿐인 오빠마저 힘든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을 때, 젊은이는 어린 나이에도 엄마의 병시중과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누구도 보듬어주지 않는 어린 마음에 생활고의 무게가 실렸고, 한창 꿈꾸어야 할 나이에 밤샘 물류센터에서 고생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는 고백에는 가슴이 시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젊은이는 비뚤어지지 않고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젊은이의 눈동자 속에는 아픈 시간을 거쳐 더욱 깊어진 지혜와 단단함이 밝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내내, 제 눈가에는 뜨거운 것이 고였지만 저는 애써 참고 시선을 거두었습니다. 젊은이가 애써 살아온 시간을, 스스로 단단히 지켜온 자존감을 제가 감히 흐트러뜨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젊은이의 삶에 대한 예의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지더군요. 두 개의 종교, 두 개의 야구팀, 그리고 몸에 새겨진 굳건한 문신들까지. 이 모든 것은 젊은이가 삶의 고통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생존의 방식이자, 자신을 지키는 옹골찬 방법이었을 겁니다. 매몰될 것 같은 절망 앞에서 부처님께 무릎 꿇고, 한 줄기 빛이 필요할 땐 하느님께 기대었을 겁니다. 좋아하는 팀이 진다고 세상까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또 다른 희망을 품었을 것이고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 상처 위에 새로운 다짐의 문신을 새기며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던 게지요.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며 내일을 향해 나아갔던 젊은이만의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젊은이의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삶의 진한 이야기와 더불어 작지만, 소중한 나의 다짐이 피어올랐습니다. 어쩌면 제게 주어진 짧은 인연일지라도, 젊은이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흔들림 없이 곁을 지켜주는 '좋은 어른'으로 남아주어야겠다고요. 그 단단한 청춘의 기록을 떠올리는 지금, 나는 과연 얼마큼 '좋은 어른'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송영관 에버랜드 주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