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가 있는 시(詩)

이도백하(二道白河) Ⅲ - 조선족 자치구

by 보리

이도백하(二道白河) Ⅲ

- 조선족 자치구


별을 세다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고개 숙이니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백두의 밤하늘이 높고

빛나는 이유는

지금도

누군가 울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아이가 심은 감자밭에

여름이 들기도 전에

지도가 바뀌었다.



누가 국적을

종이 한 장에 팔았는가


천지에서 쏟아진 빛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길이 나뉘고

강도 나뉘고

눈물은 강이 되고

강은 또 눈물이 되어


돌아보지도 않고

돌이킬 수도 없어

스스로를 지우며 흘러간다.



가장 맑고 하얀 이름으로

가장 순한 이름으로

가장 슬픈 땅을 적신다.


눈물에

떠내려간 시간을 적신다.






이름 없는 언덕

울창한 낙엽송 아래

만주로 건너간

이백만 조선인

그 절반은

아직도 이 땅에 산다.

국적은 달라졌어도

심장은 여전히

조선에 머물고

백두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백두산의 숨결이 느껴지는

마을입구

낯선 말투 속에서

같은 단군의 후손이 가진

익숙한 눈동자를 만난다.


조선족 아주머니의 주름결엔

엄마가 금방 푼 밥에서 오르는 김처럼

엄마 냄새, 고향의 정이 남아있다.


인간이 만든 경계

흐름은 신의 것이니

이도백하

너는 오늘도

조용히 국경을 잊고 흐른다.

강물보다 먼저 흐르는 건

산을 닮은 사람들의 숨결이었다.

이도백하는 내 안의 물이었다.

백두의 심장에서

떠내려온 그리움이었다.

흐르지 않는 마음 하나

거기 남겨두고 왔다.





[[ 가족사 ]]


해방 후 목숨 건 귀향


우리 조상들은 첩첩산중 척박한 경상북도 상주에서 살았다. 증조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셨고, 가난했지만 동막골처럼 평화로운 삶을 꾸려가셨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약 30만~100만 명의 조선인 남성을 강제로 병력·노동력으로 동원하였다.


수많은 조선인들은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었으며,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수십만에 달한다.


특히 전장에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과 함께 싸우거나 총알받이 보조병으로 보내졌으며, 그 숫자는 일본 본토 출신 군인(약 24만 명)을 넘어선다.

이는 일본이 자국민보다 식민지 청년들을 더 많이 소모하며 전쟁의 대리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비극을 보여준다.


1940년대 중반까지 약 6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 본토, 사할린, 만주 등지로 노동자로 끌려갔으며, 상당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군수물자 조달을 명분으로 조선 내 금속류를 조직적으로 수탈했으며, 집집마다 놋그릇, 놋숟가락, 사찰과 성당의 종까지 징발해 갔다.


또한 세계 전쟁 역사에 유래없는 전쟁위안부로 조선의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였고 그 수는 학자에 따라 약 2만~20만 명에 달한다 한다.

그런데 일본은 공식적으로 240명만 인정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산 증인들은 2025년 5월 현재 6명만이 생존해 계시다.


https://newstapa.org/article/gKQKX사진자료 : 뉴스타파

일제의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진 1938년 무렵 삼대독자셨던 할아버지는 홀로 북간도 혹은 연해주로 떠나셨다.

그리고 몇 년 후 먹고 살기 어려웠던 할머니는 큰고모와 어린 아버지, 그리고 갓난쟁이 작은아버지를 업고 남편을 찾아 그곳으로 향하셨다.

어린 자식 셋을 데리고 낯선 이국땅까지 가신 할머니의 용기는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 넓은 땅에서 어떻게 할아버지를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만났고, 몇 년간 그곳에서 살았으며, 해방되던 해 막내 작은아버지를 낳으셨다.


해방되었으니 고향에 가야겠다고 생각하시고 갓난쟁이 막내 작은아버지를 업고 귀향길에 오르셨다고 한다.

해방둥이이신 막내 작은아버지가 3월 1일(음력) 생이라고 하니 갓난아기를 데리고 바로 귀향할 생각은 못하셨을 거 같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최소한 몇 개월은 지나서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럼 겨울 가까웠을 텐데 일제가 패망 직후(1945년 8월 20일경) 소련군 남하를 저지하려 대동강 철교를 폭파했으니 기차 운행도 멈춘 그 머나먼 길을 걸어, 휘어진 대동강 철교를 기어서 건너면서도 모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기적 같다.


조부모님이 그렇게 목숨 건 귀향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조선족으로 북간도 어디 살고 있을 것이다.

1905년에 준공된 대동강 철교 760미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의 760미터의 다리 사진자료https://blog.naver.com/cjdgkdus/222265039117

큰고모는 사춘기 여자아이라 온 얼굴에 검정 칠을 해서 일부러 더럽게 꾸몄고, 막내 작은아버지는 할머니가 업고, 둘째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 등짐에 지고, 우리 아버지는 작은 봇짐 하나를 짊어지고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살겠다고 너무도 재빠르게 앞에서 기어갔다고 할머니가 그러셨다.

아버지가 1935년생이시니 해방 나던 해면 열한 살쯤 되셨겠다.


겨울을 앞두고, 갓난아기를 품고 험한 길을 걸어왔을 그 여정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 때 대동강 철교를 기어서 건너는 사람들 _ AP 기자 맥스 데스포가 1950년 12월 4일 촬영한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

30년 전쯤,

하얼빈 인근에 살던 할아버지의 사촌형 가족이 물어물어 우리를 찾아왔다.


고이 간직한 족보를 들고 전국을 돌며 친척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우리가 '중국 고모'라고 불렀던 고모는 명문대를 나와 교사까지 하다가 한국에 돈을 벌러 오셨고, 그 조카도 한국으로 와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고모에게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살던 애환을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중국어로 배우는데 집에서는 철저하게 조선어를 써야 했고, 어쩌다 중국어가 입에서 나오면 부모님이 하루 종일 밥을 굶겼다고 했다.

그 고모의 조카와도 수시로 만나고 친밀하게 지내며 조선족의 차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중국(한족) 아이들이 조선족을 괴롭히면 칼을 품고 다니면서 싸우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족끼리는 더욱 똘똘 뭉쳤다고 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와 지극히 한국적 식성, 그리고 사고방식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짙은 고향색을 가지고 있어 이주 1세대들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철저한 민족정체성 교육을 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중국고모는 음식솜씨가 좋아 주로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다 돌아갔다.

6조선족들이 유난히 교육열이 높아 소수민족 중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데 남편도 자녀들도 다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동북공정 정책을 통해 조선족을 분산시키고, 교육과 문화 속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며 민족 정체성을 흐리고 있다.


할아버지가 북간도에서 사셨는지, 연해주에 사셨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사촌형이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 하니, 연해주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짐작된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가까운 친척이라도 곁에 두고 싶으셨을 것이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은 과거 80%를 넘었지만, 지금은 약 30% 내외로 줄었다.

특히 이도백하가 흐르는 백두산 일대를 중국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며, 조선족 비율이 60%에서 20% 이하로 떨어졌다. 관광개발과 분산정책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들어 알고 있던 가족사를 더 세세히 알고 싶으나 이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일제강점기에도, 6.25 전쟁 중에도 한 명의 가족도 잃지 않은 것을 평생의 복으로 여겼던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역사의 산증인들이 세상을 떠나시고 중국이 우리 역사를 지우기 위한 동북공정은 현재진행 중인 지금, 작은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중국어 병기 우선순위 변화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1952년 자치주 설립 이후, 간판이나 공공표기에서 한글을 좌측 또는 상단에 우선 배치하는 관행이 약 70년간 유지되어 왔다. 이는 조선족 자치권과 언어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22년 8월, 연변주정부는 ‘중국어 우선 표기’ 규정을 공포하며 기존의 관행을 공식적으로 전환했다.

새 규정에 따르면 가로형 간판은 좌측에 중국어를, 세로형은 우측에 중국어를 먼저 배치해야 한다. 이에 따라 한글이 앞서 있던 간판들도 순차적으로 중국어 우선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중화주의적 언어통일 전략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연변은 행정·공공영역에서 중국어 중심 체제로 구조적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6.25 잊혀진 전쟁

https://vrmake.co.kr/book/625/?utm_source=chatgpt.com

대동강 철교를 기어서 건너는 사진을 찍었던 AP 기자 맥스 데스포가 1950년 12월 4일 촬영한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이 게재된 사이트로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준다.


2019년 6월 8일, 아직 얼어있는 백두산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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