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그림자
산 그림자
막
모내기를 끝낸
어린 논에서
거꾸로 선 산이 젖어있다.
울퉁불퉁한 골짜기
질긴 능선조차
물처럼 유순한 얼굴로
거꾸로 매달려
조용히 뿌리를 내린다.
하늘을 짊어졌던 능선이
스스로 허리를 굽혀
논바닥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개구리도 숨죽인
낮은 물 위에
절벽을 깎던 오만도
그늘 속에 갇혀
부드럽게 젖어든다.
주름진 수면 위
잔잔히 쓰인 고백,
그 떨림 사이로
새 한 마리 스치면
산도 잠시 흔들린다.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곳에 엎드릴 때,
그늘 속에서조차
세상은 환해진다.
그늘 아래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얼굴이 된다.
여명(黎明)의 새벽
마을 산책길에 나섰다가
모내기 마친 논에 비친
산 그림자를 만났다.
산이
물 위에 거꾸로 누워있다.
하늘을 이고 서서
세상을 굽어보던 산이
얕은 물 위에 겸손하게 자신을 펼쳐
엎드려있다.
산이 허리를 굽히면
논이 그 이마를 받아낸다.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
하나 되는 아름다운 순간
산그림자는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바람 한 줄에도
고요히 젖는다.
꽃과 나무의 향기
흙냄새 머금은 바람,
거친 골짜기와 옹달샘까지
모두 가졌으나
그늘로 앉아
그저
묵묵히 자신을 비워낸다.
세상에 부딪혀 멍든 마음도
그늘을 짓고 앉으면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어깨를 내주듯
슬픔이 내리는 곳에서
기다림이 자란다.
물 위에 떠 있는 산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으나
가장 깊은 뿌리를 내려
지구 심장에 닿아있다.
거울이 두려운 이유는
진실을 비추기 때문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물속의 산을 본다.
존재의 거울 앞에 서서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이렇게
비칠 것이다.
원래 있었으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