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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n 29. 2017

생명을 대하는 글쓰기

글쓰기가 아이를 어떻게 성장시키나

한 아이가 등굣길에 달팽이 한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가방은 건성으로 메서 한 쪽 어깨끈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면서도 블루베리 통 안에 든 달팽이는 두 손으로 고이 감싸 안다시피 했는데

저를 보자마자 자랑하듯 열어 보여줍니다.

알록달록 야무지게 생긴 집을 등에 지고 길게 뻗은 더듬이가 촉촉한 달팽이.

그 아래에는 방금 뜯은 배춧잎이 고이 깔려 있군요.

그것도 모자란지 배춧잎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화장실에 가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옵니다.






"아빠가 잔디를 깎을라 그러는데 이 왕달팽이가 있었다요."


순식간에 아이들이 몰려들고 저마다 자기가 아는 달팽이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합니다.

몇 분 간 그 소란을 지켜보다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아침 글쓰기를 시작하려는데 한 아이가 짜증을 냅니다.


"아오, 선생님. 지금 글쓰기를 하라 그럼 어떡해요. 그러다 저 달팽이가 죽으면 어떡할라 그래요!"


요 녀석들, 글쓰기가 어지간히도 싫은가 봅니다.


"아니, 뭐... 글쓰기 한다고 달팽이가 죽는 것도 아니고..."


제가 영 갈피를 못 잡고 대충 얼버무리자 두 아이가 협공을 합니다.


"그러니깐요. 근데 우린 아직 달팽이 다 못 봤단 말이에요."


달팽이를 더 보고 싶다는 뜻이었나 봅니다. 

아이고, 달팽이는 쉬는 시간에 보면 좋을 텐데 요 녀석들 표정을 보니 오늘 종일 공부는 팽개치고 달팽이를 볼 심산이군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전 제가 하려던 걸 밀고 나갑니다. 아이들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입을 비쭉거리고 눈을 흘기는군요.


오늘의 글쓰기 주제는 '비에게 편지 쓰기'입니다.

계속 비가 안 와서 학교 텃밭에 심은 농작물들이나 화단의 꽃들이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글쓰기라는 일종의 기우제를 지내려는 겁니다.

그런데 달팽이 때문에 아이들 글쓰기가 오늘따라 더 성급한 느낌입니다.

빨리 쓰고 달팽이가 보고 싶은 거지요.

그렇다고 달팽이 못 보게 하고 글을 더 쓰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휘리릭 쓴 글을 저에게 휙 던져 놓고 달팽이에게 달려갑니다.

근데 유독 다른 아이 보다 정성스럽게 글을 쓰는 아이가 보이는군요. 바로 달팽이를 가져온 아이입니다.




비야

내려

우리 달팽이

물 먹을 거 줘

내놔

안 내놔?

아오~

내려줘

내 부탁이야



달팽이는 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좁은 블루베리 통에 오래 가두면 안 되는 것도 알지요.

그래서 오늘 집에 가면 달팽이를 다시 마당에 놓아 줄 생각인가 봅니다.

그런데 뭔가 불안한가 봅니다. 요즘 날씨 때문이지요.

몇 달 째 비는 안 오고 해만 쨍쨍 내리쬐고 있으니까요.

아이의 달팽이가 마당으로 무사히 돌아가려면 비가 와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하늘을 보니 영 비올 기미가 안 보였겠지요.

그래서 비에게 협박도 하고 사정도 하는군요.

비를 향한 아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이런 글은 제가 더이상 손을 댈 수가 없군요. 이미 완벽한 글이니까요.

이 글을 위대하게 만든 힘은 달팽이에 대한 사랑에서 왔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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