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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29. 2015

아기 고양이 한 마리

어느 날 학교에 오게 된 고양이와 아이들 이야기

신발 상자 안에 검은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푹신한 내복이 밑에 깔려 있고 그 옆 약병에는 분유가 들어 있다.

주인에게 버려진 이 고양이는 우리 학교 한 아이에게 발견 되었다.

아이의 부모님은 고양이 기르기를 허락지 않으셨다.

아이는 고양이를 학교에 데려 왔고 우여 곡절 끝에 1학년 교실에 오게 되었다.


1학년 아이들이 열광했다. 선생님 이 고양이 우리 교실에서 키우면 안 돼요?

내가 삐딱하게 말했다. 니네가 교실에서 뛰고 떠들잖어. 고양이가 시끄러워 못 살지.

아이들이 한 풀 낮춘다. 우리가 교실에서 안 뛰고 안 떠들테니 키워요, 네?

난 여전히 삐딱하다. 고양이가 먹을 게 없잖어. 고양이가 배 고파 못 살지.

아이들이 또 한 풀 낮춘다. 우리가 먹는 우유 덜어 줄테니 키워요, 네?

나의 삐딱함도 계속 된다. 니네가 집에 가면 선생님 혼자 돌봐야 되잖아. 아이고, 선생님 힘들어 못 살겠네.

아이들이 더 낮춘다. 우리가 선생님 말 잘 들어서 선생님 힘들지 않게 할테니 키워요, 네?

그러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조건을 내건다.

점심시간에 급식 잘 먹기, 선생님이 말 안해도 우유 마시기, 아침에 오면 그림 일기 알아서 쓰기,

바깥놀이 하다가 선생님이 부르기 전에 알아서 들어 오기, 선생님한테 짜증 부리지 않기


아이들이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다. 아이들은 한 번도 스스로 이런 거래를 제안 한 적이 없었는데

이름도 모를 고양이 한 마리에 이렇게 센 약속을 과감하게 하고 있다. 얼마나 키우고 싶으면 저럴까.

태어난게 무슨 죄라고, 어미와 떨어져 여기 까지 오게 된 저 고양이의 기구한 삶과,

엄마와 떨어진 채 학교에 맡겨져 싫은 공부를 해야 하는 자기들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고양이를 닮은 아이들의 삶이 애잔하다.


까미, 검돌이, 쪽쪽이, 구름이, 별.

고양이의 이름으로 여러 의견이 나왔다. 아이들이 합의를 못하고 다퉜다.

난 삐딱하게 말했다. 거 봐, 니네가 그렇게 싸우면 고양이가 속상해 못 살지.

그러자 한 아이가 말한다. 야, 그럼 자기가 맘에 드는 이름에 손들기 하자.

또 한 아이도 말한다. 저 고양이 데려 온 사랑이 언니가 까미라 그랬어. 까미야.




쉬는 시간마다 다른 학년 형님들이 고양이를 보러 교실로 몰려 왔다.

때문에 더이상 고양이를 교실에 둘 수 없어 복도에 내 놓아야 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매달렸다.

안 돼요. 언니들이 까미를 만지면 까미가 놀라잖아요.


언니들이 읽을 수 있게 규칙을 만들기로 했다.

아이들은 아예 고양이 옆에 착 붙어서 형님들이 보러 올 때마다 먼저 규칙을 읽으라고 안내했다.

가끔 규칙을 읽지 않는 형님이 오면 나에게 와서 일렀다.

어느새 아이들은 고양이의 보호자가 된 듯 했다.



 

살아 있는 대상에 대한 아이들의 자비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윈이 지은 '인간의 유래'를 보면 인간이 정서적으로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나온다.

고등정신기능에서 유래된 도덕적 자비심이야 말로 신체적으로 약한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힘이라고.

도덕성이야 말로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적대적 관계를 누르는 힘이자 사회성의 원천이다.

학교 폭력, 부정부패, 중독, 우정, 심지어 연애와 결혼에 이르기까지

타인나에 대한 경계를 풀고 나를 좋아하게 되는 속도는 도덕성의 양과 비례한다.

그래서 학교는 도덕 교과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도덕성은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나온다.

도덕성이 결여 된 아이는 개미를 함부로 밟아 죽이고도 아파할 줄 모른다.

자기 때문에 친구가 속상해 울고 있어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자기는 그냥 좀 때렸을 뿐인데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도덕성이 연습되지 않은 아이에게 상대의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은 참 어려운 이다.

이렇게 도덕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집단의 배척을 받는다.

저 아이가 언제 나를 그냥 때리고도 뻔뻔하게 나올 지 모르니 미리 경계하고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배척을 받는 당사자는 친구들이 왜 자기만 싫어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교사에게 와서 끝없이 일러 바친다.

저 나쁜 아이들이 자기만 따돌린다는 것이다.

이럴 때, 는 난감해진다. 다른 아이들이 왜 그 아이를 싫어하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 이해하는 교사의 설명을, 정작 그 아이는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에게 호소한다. 우리 선생님까지 나를 따돌려요.

학부모는 말한다. 담임이 아이들을 부추겨 자기 아이를 미워한다고.



이 일기를 쓴 아이는 처음에 '불쌍하다'는 글자를 어떻게 쓰냐고 물어 왔다.

내가 종이에 써서 건네자, 잠시 고민을 하더니 좀 더 쓰기 쉬운 '귀엽다'는 표현으로 바꿨다.

고양이가 왔어요. 귀여웠어요.

난 이 아이의 '귀엽다'는 표현 속에서 아이의 가슴 속에 따뜻하게 움트는 측은지심을 읽는다.


학부모들은 요구한다. 우리 아이를 도덕적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래서 따돌림 받지 않게 해 달라고.

문제는 유아기에 제대로 학습되지 않은 도덕성은 나중에도 학습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차라리 그 아이가 어릴 때 측은지심을 느낄 기회가 좀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측은지심은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불쌍히 여기려면 내가 상대 입장이 되어 보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내가 어미를 잃은 고양이의 입장이 될 수 있어야, 고양이의 울음이 비로소 내가 엄마를 찾으며 울던 경험과 동일시 되고

아기 고양이를 봄과 동시에 저 고양이가 엄마 보고 싶겠구나, 내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동일시의 경험이 건강한 애착관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자비심은 피어난다.

이런 경험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게 아니다.


저 고양이를 버린 주인이 누구냐고, 사람이 어쩜  나쁠 수 있냐고, 아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눈 앞에 있는 고양이가 울면 운다고 쳐다보고 자면 잔다고 쳐다본다.

측은지심이 도덕성의 시작이라면, 저 어린 고양이야 말로 좋은 스승인 셈이다.




PS : 고양이 후기 를 알려드려야 겠군요. 그날 오후, 급식실에서 일하시던 분의 가정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도 가끔 그분께 고양이의 안부를 묻습니다. 학교가 시골에 있다 보니 들고양이 사람들이 와서 버리고 간 강아지들이 가끔 운동장에 옵니다. 그럴때마다 아이들은 출동을 해서 교실로 데려 오기도 합니다. 대부분 집에서 개를 키워서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입니다. 대신 전 예방접종되지 않은 동물과의 접촉을 말리느라 저는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오가면서 자동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 뱀, 개구리 등의 이야기를 저에게 해 줍니다. 죽음이 죄의 댓가는 아닐텐데...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할까봐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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