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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Apr 08. 2019

내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내'가 될 수 없다.

매개체 혹은 있는 그대로도 존재할 수 없는 세계  <나의 작은 시인에게>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결이 다른 영화였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서 내가 상상했던 것은 한 선생님이 우연한 기회에 어린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을 더욱 발전시켜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어린아이와 돈독한 관계를 쌓아가는 스토리라인이었다. 하지만, <나의 작은 시인에게>를 보고 나서 내가 단순히 포스터만으로 영화를 섣불리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닳았다. 아름다운 시적 언어에 매료된 한 여성이 어린아이의 뛰어난 재능을 훔치고, 급기야 그 아이를 납치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번듯한 직업과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 이미 장성해서 자신의 삶을 알아서 잘 살아가는 아이들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배회하는 한 여성.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가르쳐주던 선생님마저 자신에 대해 냉소적인 상태가 이르게 되자, 그녀는 어린아이의 재능 즉, 자신만이 그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깊게 집착하고 만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재능'이 자신에게 허락한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인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에 대해 만족한 사람이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에 대해 절망하면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다른 이의 엄청난 재능에 대해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 단순히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감정만을 느낀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감정들은 대개 자신의 '존재'와 '재능'을 연결 짓게 만든다.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한 여성의 심리 스릴러’라고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비극’에 가까웠다. 어중간한 재능을 갖고 있는 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재능을 자신의 원생이 가졌다는 것을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리사에게 그 원생은 단순한 원생이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존재'가 된다. 지미의 재능에 대해 무관심한 지미의 아버지나, 친구들과 천박하게 어울리는 자식들. 자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녀는 지미의 재능에 더욱 집착한다. 지미의 재능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을지라도 지미의 재능을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고양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더욱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게 만든다. 이 현실과 그녀의 '환상'간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는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의 작은 시인에게> 엔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다. 지미에게 신고당해 리사는 경찰에 잡혀가고, 지미는 이제 경찰에게 인도되어 리사와 안전하게 분리된다. 경찰차에 잠깐 있는 동안, 지미는 새로운 시가 떠오르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시가 떠올랐다고 소리친다. 지미가 소리치는 동안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너무 뛰어난 재능이기에 질투했지만, 그 재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리사였기에, 그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아이러니한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자신이 될 수 없다. / 어중간한 재능은 저주다.'라고 말하면서도 영화는 빛나는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관심한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어린아이의 천재적인 재능을 전달하는 매개체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리사의 비뚤어진 욕망뿐이었다.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삐뚤어진 욕망으로 자신만의 문화적 유토피아를 만들고 싶었던 한 여성을 집요하게 보여주면서 이 삐뚤어진 여성이 소유하고자 했던 빛나는 재능에 대해서는 오히려 침묵하고 묵살한다. 이 영화의 엔딩은 차라리 위험한 욕망이 어린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 부조리함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어중간한 재능을 저주하며, 남의 재능만을 탐하는 매개체만 될 것인가. 가질 수 없는 타인의 특출한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의 재능과 현재의 생활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것인가? 세상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와 상징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 가운데에서 어떤 매개체가 될 것인가. 그것은 나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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