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상처를 주는 이유 5
“난 지금도 변하지 않아.
그때로 똑같이 돌아가도 네가 그때처럼 똑같이
나에게 말한다면, 나도 너에게 똑같이 말할 거야.”
남편은 내 말을 듣고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내가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음을.
남편은 나의 요구가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부당한 요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날의 상처도 다 아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하다니.
자신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공격의 방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자신 스스로를 방어한 것이다.
. . .
그 후 우리는 한동안 싸움을 이어갔다.
나는 이혼의 상처를 회복하고 싶었는데,
남편과의 신뢰를 쌓고 싶었는데,
남편은 내가 변하지 않으면 똑같을 것이라고 하니
아, 이 사람은 내 허물을 덮어주지 않을 사람이구나.
자신이 힘든 일이 닥치면 나를 버릴 사람이구나.
그간 느꼈던 사랑, 신뢰, 안정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한번 싸움이 시작되면
계속 공격과 방어 자세를 이어간다.
나는 이 싸움이 길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나도 점점 마음이 닫혀간다.
오늘 이 남자와 끝장을 보리라.
그때, 딸이 잠에서 깨어 안방으로 찾아왔고
우리는 서둘러 싸움을 멈췄다.
싸움은 멈췄지만 아직 감정이 남아있어
도저히 남편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딸 방에서 잔다며 나왔고,
혼자 긴 밤을 뒤척이며 밤새 생각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등원시키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 등원 후,
서로 필요한 몇 마디를 나눈 다음
내가 먼저 말문을 텄다.
어제 우리 못다 한 이야기를 하자고.
나는 긴 밤을 지새우며
마음속에 되뇌었던 말을 꺼냈다.
“어제 나는 오빠에게,
우리가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이혼하자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대화로 잘 풀면서
잘 살아보자고, 그 말을 하고 싶었어.
근데 오빠가 과거로 가도 똑같이 할 거라고 하니까
그동안 우리가 했던 노력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었어.
솔직히 나는,
그때 과거로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모유수유를 중단했을 것 같아.
하지만 그 당시에
단유 하겠다고 오빠에게 말하러 갔을 때
오빠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반드시 단유 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오빠의 의견을 좀 더 들어봤을 것 같아.
그런 식으로 타협 없는 태도로 말했던 것은 미안해.
하지만 오빠가 나에게 모유수유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내 고통과 노력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내가 오빠에게 감히
최선을 다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듯,
오빠도 내가 아닌데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오빠 말대로 내가 모유에
100퍼센트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건 맞아.
나는 내 몸도 추슬러야 했었고,
아이도 돌봐야 했었기 때문에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가 있었고,
내 판단으로 아이를 위해
최선의 방향으로 선택을 한 거야.
그리고 나는 내심, 분유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
우리 엄마는 돈이 없어서
우리 넷 모두 모유수유를 했다고 해서
분유가 마치 부의 상징처럼 느껴졌었어.
그래서 가끔, 분유를 타서 젖병에 담고
아이에게 먹이는 상상을 하곤 했어.
그래서 나는 분유를 선택하기 더 쉬웠던 것 같아.
나는 오빠와의 이 일이 상처가 돼서,
오빠와 신뢰를 쌓고 싶어서,
이 일을 풀어내고 싶었는데
오빠가 이 일을, 자신도 상처라고 말하면서
덮어두고 말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나는 ‘이 사람은 나와 신뢰를 쌓고 싶지 않고
불신의 마음을 남겨두려 하는구나.’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 “
내 말이 끝나고
조용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상처에서 머물지 않고
상처를 극복해 보려고 노력할게.
그리고 이혼을 얘기한 부분은,
너는 내가 마치 홧김에 이혼을 꺼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네가 얼마 전에 죽을 것 같이 힘이 들어
차라리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을 때,
그때의 네 마음처럼 나도 마찬가지로
죽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
분유에 대한 로망 이야기를 들으니까
네 마음이 더 이해가 된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았다고 말한 건 사과할게.
네 말대로 다른 사람의 일을
함부로 최선을 다 했다 안 했다
함부로 예단한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
무튼 내가 멋대로 판단한 건 맞으니까.
미안해. “
그리고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마음을 열고 내 말을 들어주고,
상처를 회복하겠다 고백하는 남편에게
“용기 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우리의 벌어졌던 깊은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을지라도
이젠,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것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