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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Feb 23. 2020

내 안에 남의 기준만 가득해서

스물한 번째 한 글자 주제, 남

20대의 막바지, 사회생활 5년 차.

그냥 그런 때와 마찬가지인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진걸 새삼 느낀다.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태까지는 내게 주어진 명확한 역할들이 있어 ‘무엇’에만 집중해왔다. 수능을 잘 치러내야 하는 고등학생, 학점을 잘 받아둬야 하는 대학생, 어디에라도-하지만 이왕이면 부모님 내지 지인들이 알아줄만한 곳에-취직해야 했던 취준생, 회사에 잘 적응하고 1인분을 해내는 직장인. 분명 도달하는 과정이 아주 순탄하지는 않았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가는 길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으니까.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같은 길, 혹은 적어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주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회사를 다니며 책을 써서 저자가 된 사람들, 퇴사하고 와인바를 차린 옛 동료,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 등등. 제각기 다음 스텝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지금 있는 내 자리가 내게 맞는 자리인지, 혹은 내게 더 잘 맞는 곳은 어딜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불안감이라는 파도가 밀려왔다.

불과 두 달 전, 나 자신을   사랑하는  해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그저 모든 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지, 왜 아무것도 손을 못 대겠는지 알고 싶었다. 오고 간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한 건 이런 거였다.  안에 내가 없다는 .  안에 남의 기준만 가득하다는 .  안의 것들이 사실은  것이 아니니 만족스럽지 않은데  것도 없어서 갈피 잡기 어려운 상태라는 . 돌이켜보면 내가 항상 부러워하면서 스스로에게 속상해 한 포인트는 이거였다. 남들은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걸 척척 찾아내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걸 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 아닌가, 샘나고 부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오래 교육받아온 미덕 중 하나는 바로 ‘경청’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 웃기게도 내세울  별로 없는 내가 오랫동안  ‘특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듣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야기를 경청하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말이 쉽지, 나도 너무 잘하고 싶은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그걸 배울 수 있게 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이 주신 팁,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나에 대해 적어보고,  그게 마음에 드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지 알아보기.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100 이상 적기(!!)였다. 선생님의 전공 수업 때 하던 과제인데, 이렇게 적은 것들을 묶어가다 보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알게 되고, 그걸 기반으로 내 안의, 나만의 ‘법’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거라고. 참고로 자기는 164개를 적었고, 적으라고 하면 다들 기함하지만 어떻게든 채워낸다고. 그러니 한번 해보시라고.

나만의 법이란 건, 내 마음속의 헌법이랄까. 우리나라 법과 미국 법이 다르다고 해서 너네는 왜 그렇게 하냐고 비난하지 않듯, 내 마음에 법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너는 왜 그렇게 하냐고 얘기해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거라고.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를 보호하는 법, 내가 결정하는 법 같은 조항을 만들면 되는 거라고. 이 마법 같은 단어를 듣자마자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안의 법이라니! 나만의 기준이라니! 그런  사실 실재하는 거라니! (솔직히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척척 결정하나 싶다가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할 거라고, 이런 명확한 기준 따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평생 가지고 싶었던 게 이렇게 명확해지다니 어서 빨리 손에 얻고 싶어 졌다.

하지만 평생을 찾아 헤매던 게 그렇게 한 손에 쉽게 들어올 리가. 사실 이 상담을 받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마음에 드는 나를 55개 밖에 채우지 못했다. 겨우 이만큼 채우면서도 이미 적어둔 것과 겹치는 것들만 자꾸자꾸 생각나서 그간 써놓은 리스트를 몇 번이나 들춰봤다. 선생님은 어떻게 164개나 쓰신 걸까, 조급한 마음에 지금 써둔 리스트를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버릴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게 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나의 온전한 조각인지 잘 모르게 될 것 같으니까, 조금 더 힘을 내봐야겠지.

새로운 주에는  나머지 50 목록을  채워봐야겠다. 나만의 법을 나도 가지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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