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한 글자 주제, 남
20대의 막바지, 사회생활 5년 차.
그냥 그런 때와 마찬가지인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진걸 새삼 느낀다.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태까지는 내게 주어진 명확한 역할들이 있어 ‘무엇’에만 집중해왔다. 수능을 잘 치러내야 하는 고등학생, 학점을 잘 받아둬야 하는 대학생, 어디에라도-하지만 이왕이면 부모님 내지 지인들이 알아줄만한 곳에-취직해야 했던 취준생, 회사에 잘 적응하고 1인분을 해내는 직장인. 분명 도달하는 과정이 아주 순탄하지는 않았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가는 길이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나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으니까.
하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같은 길, 혹은 적어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주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회사를 다니며 책을 써서 저자가 된 사람들, 퇴사하고 와인바를 차린 옛 동료,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 등등. 제각기 다음 스텝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지금 있는 내 자리가 내게 맞는 자리인지, 혹은 내게 더 잘 맞는 곳은 어딜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불안감이라는 파도가 밀려왔다.
불과 두 달 전,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는 한 해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그저 모든 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갈피를 못 잡는지, 왜 아무것도 손을 못 대겠는지 알고 싶었다. 오고 간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한 건 이런 거였다. 내 안에 내가 없다는 거. 내 안에 남의 기준만 가득하다는 거. 내 안의 것들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니 만족스럽지 않은데 내 것도 없어서 갈피 잡기 어려운 상태라는 거. 돌이켜보면 내가 항상 부러워하면서 스스로에게 속상해 한 포인트는 이거였다. 남들은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걸 척척 찾아내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걸 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 아닌가, 샘나고 부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오래 교육받아온 미덕 중 하나는 바로 ‘경청’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 웃기게도 내세울 것 별로 없는 내가 오랫동안 내 ‘특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 듣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난 내 이야기를 경청하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말이 쉽지, 나도 너무 잘하고 싶은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그걸 배울 수 있게 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이 주신 팁,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나에 대해 적어보고, 왜 그게 마음에 드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지 알아보기.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100개 이상 적기(!!)였다. 선생님의 전공 수업 때 하던 과제인데, 이렇게 적은 것들을 묶어가다 보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알게 되고, 그걸 기반으로 내 안의, 나만의 ‘법’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거라고. 참고로 자기는 164개를 적었고, 적으라고 하면 다들 기함하지만 어떻게든 채워낸다고. 그러니 한번 해보시라고.
나만의 법이란 건, 내 마음속의 헌법이랄까. 우리나라 법과 미국 법이 다르다고 해서 너네는 왜 그렇게 하냐고 비난하지 않듯, 내 마음에 법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너는 왜 그렇게 하냐고 얘기해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거라고.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를 보호하는 법, 내가 결정하는 법 같은 조항을 만들면 되는 거라고. 이 마법 같은 단어를 듣자마자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내 안의 법이라니! 나만의 기준이라니! 그런 게 사실 실재하는 거라니! (솔직히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척척 결정하나 싶다가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할 거라고, 이런 명확한 기준 따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평생 가지고 싶었던 게 이렇게 명확해지다니 어서 빨리 손에 얻고 싶어 졌다.
하지만 평생을 찾아 헤매던 게 그렇게 한 손에 쉽게 들어올 리가. 사실 이 상담을 받은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마음에 드는 나를 55개 밖에 채우지 못했다. 겨우 이만큼 채우면서도 이미 적어둔 것과 겹치는 것들만 자꾸자꾸 생각나서 그간 써놓은 리스트를 몇 번이나 들춰봤다. 선생님은 어떻게 164개나 쓰신 걸까, 조급한 마음에 지금 써둔 리스트를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버릴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게 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나의 온전한 조각인지 잘 모르게 될 것 같으니까, 조금 더 힘을 내봐야겠지.
새로운 주에는 꼭 나머지 50개 목록을 좀 채워봐야겠다. 나만의 법을 나도 가지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