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한 글자 주제, 남
요가를 시작한 지 어느새 1년 하고도 6개월이 되었다. (내게는) 꽤 경이로운 지속이다. 이게 어떤 종류의 운동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원래 나는 모든 종류의 운동과 지나칠 정도로 연이 없었으니까. 입사와 함께 시작한 필라테스를 통해 처음으로 몸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운동을(학생 때는 돈이 없어서 못했던 운동을) 자발적으로 시작했어서일까. 2년쯤 열심히 하다가 반복되는 시퀀스가 조금 지겨워질 찰나에 요가를 알았고 그대로 옮겨 탔다. 대학생 때 이미 한 번 시도했다가 두 달만에 관뒀던 요가인데, 몸 쓰는 법을 조금 알고나서 배우니 다른 운동 같았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꼬박꼬박 갔다. 몸의 변화가 느껴지는 요즘 들어서는 더 재미가 붙어 일주일에 세 번이나마 꽉꽉 채워 갔다. 몸은 조금씩 변했다. 저게 사람 몸으로 가능한 건지 이해도 안 가던 동작이 조금씩 되기도 하고, 발 끝에 닿을락 말락 하던 손이 이제는 바닥에도 닿는다.
문제는, 몸이 정말 '조금씩'만 변한다는 데 있다.
나는 유연성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검은 띠까지 따놓고도 결국 울면서 태권도를 관뒀다. 관장님이 뭐만 하면 벌이랍시고 맨날 다리 찢기를 시켰는데 그게 끔찍할 정도로 아팠기 때문이다. 다른 애들은 그렇게까지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았으므로 벌은 더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하자 엄마는 애가 왜 이렇게 유연하질 못하냐며 어릴 때 발레를 시켰어야 했나 자문했다. 글쎄, 어린 내가 보기엔 유연성은 어릴 때 어떤 운동을 선택하는지보단 부모님의 유연성과 더 관련이 있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중학교 체력검정 때는 니은자로 앉아서 손을 발끝으로 쭉 뻗는 유연성 검사라는 게 있었다. 손이 발끝을 지나 삐져나오면 그 나온 만큼의 센티미터를 재서 유연성을 갈음하는 거였다. 앞 번호 여자애들이 11cm, 13cm, 못해도 6cm 정도로 쓱쓱 검사를 끝낼 때부터 초조했다. 경험적으로 나는 저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돌아오고 나는 있는 힘껏 발끝으로 손을 뻗었다. 손은 예상대로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마이너스 10!' 옆에서 센티미터를 재던 당번이 얘기하자 체육 선생님은 들고 있던 판때기로 내 머리를 때렸다. "야 인마,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해." 장난친 게 아니었으므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내 유연성은 그대로 마이너스 10이 되었다.
그게 햄스트링을 비롯한 다리 뒤쪽의 근육이 짧아서라는 건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근육이 짧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거봐 엄마, 유연성은 타고나는 거야.) 햄스트링이 짧으면 골반이 뒤로 돌아가면서 일자 허리가 되고 아래 허리가 굽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아래쪽 척추가 툭 튀어나온 것처럼 되어 뼈가 손으로 만져질 정도였지만 그냥 안 좋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 그렇다 생각했지, 무슨 근육의 가동범위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었으니까.
하여간 이건 다 변명이다. 이러한 신체적 특성으로 인하여 내 요가가 아직 초심자의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변명. 열심히 하고 있는 만큼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욕심은 점점 커지는데 도무지 몸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허리를 편 채 움직이는 동작이 나오면 나는 첫 단계에서 좌절한다.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상태에서는(애초에 남들만큼 벌려지지도 않지만) 허리를 펴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아래 허리와 허벅지에 뻐근한 감각이 찾아온다. 조금이라도 동작을 따라가려고 하면 허리는 자동으로 구부러진다. 아예 되지도 않는 동작에 패배감이 느껴질 때면, 나는 자꾸 남의 요가매트를 넘겨다 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꼭 내가 못하는 동작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역자세를 한 채 흘끔흘끔 눈알만 굴리기도 하고, 거울 앞에 서서 비라바드라아사나를 하다가 내 자세가 아니라 남의 자세를 넘겨다 보기도 한다. 그럴진대 내가 못하는 동작이 나오면 말할 것도 없다. 한참 쥐어짜다 실패하고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멋지게 자세를 취한 이들을 곁눈질로 구경한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게 저렇게 될까. 타고난 유연성일까. 아님 요가를 한 5년쯤은 한 걸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집중력이 훅 흐트러지기 일쑤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하고 내 호흡에만 집중하라고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시는데 내 시선은 자꾸 옆사람의 요가매트로 간다. 자꾸만.
이미 알고는 있다. 남의 요가매트를 넘볼 여유란 없다. 동작이 잘 되지 않을수록 오히려 내 안으로 시선을 끌고 들어와야 한다. 아주 미세해서 잘 느껴지지 않는 감각에, 내 근육이 잘게 떨리며 늘어나고 수축하는 일련의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보다 집중력을 많이 요하는 일이다. 어제보다 오늘 10%씩 쑥쑥 나아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즐겁게 집중할 수 있겠지만, 내 몸이 변화하는 지난한 과정은 내 기대보다 훨씬 느리기만 하고. 그러니 자꾸 애가 닳고 초조해진다. 내가 이렇게 고개를 처박고 있는 사이 남들은 어디까지 갔나 싶어 자꾸만 고개를 쳐들고 미어캣처럼 망을 본다. 다들 나보다 잘하고 있나? 혹시 내가 너무 못해서 다들 혀를 차고 있진 않은가?
내가 마련한 요가매트 안에서 나의 감각에 집중해야 할 시간을, 남의 요가매트를 넘보느라 너무 많이 허비한다. 인생도 별다를 것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신경 쓴다. 익명의 타자들은 금세 군집화되어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다들' 이렇게 하는데, '남들은' 저렇게 산다는데, '사람들은' 이게 맞다는데. 끊임없이 비교하며 힐끔거리게 된다. 내가 그들을 쳐다보는 만큼 그들도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을 알아 동작 하나하나에 이상한 힘이 들어간다. 호흡을 길게 유지하며 집중해야 겨우 잡히는 균형은 오가는 시선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나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늘어나고 있다. 내가 일 년을 노력해 1에서 2까지 갈 동안, 누군가는 30에서 출발해 45까지 갔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다고? 45를 넘겨다보며 황망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왜 여기까지밖에 못 왔냐고 신세한탄을 하며 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간 2배나 발전했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비교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건 다른 요가매트 위의 누군가가 아니라, 같은 요가매트 위에 서있었던 어제의 나다. 내가 1단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옆에 혜성처럼 등장한 뉴비가 4단계를 하고 있더라도, 나의 시선은 부들거리는 내 몸 안쪽에 자리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내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때에만 비로소 발전이 일어난다. 1단계에서 용을 쓰는 나를 보고 그래, 누군가 쟤는 뭔데 저렇게 못하냐고 웃든 말든. 내 시선은 내 안에만 있으므로 어차피 그건 내 시야 밖의 일이다. 내 코어 근육이 떨리고 있는 중에 시야를 넓힐 여유는 없다. 좁히고 좁히고 쥐어짜서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하니까, 그래야만 쓰러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요즈음에는 요가원에 조금 일찍 도착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는 거울을, 눈 앞에는 벽을 둔 오른쪽 가장 앞자리. 앞을 보고 섰을 때 나 이외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서 숨을 길게 뱉어본다. 이제는 안다. 자꾸 불안해지고 중심이 흔들리는 것은 내 시선이 외부로 향하고, 거기서 내게 쏟아지고 있는 수많은 시선을 발견하는 탓이다. 매트 위에 발바닥을 꾹 누르고 단단히 서서 눈을 감으면 배꼽 위로 끌어당겨지는 강한 힘이 느껴진다. 내 안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한.
오늘도 요가에서 삶의 태도를 같이 가져온다. 유난히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내 요가매트를 온전히 지켜내기는 쉽지 않을 테다. 그러나 적어도 내 시선은 이 매트를 넘어서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내 유연성처럼, 아주 조금씩은 늘어나리라 믿으며.